치우장수(蚩尤匠帥)

문화관련글발 2006/10/12 14:06
 
치우장수(蚩尤匠帥)

{이 글을 에밀레 박물관을 속리산에 만들어 민족문화원형에 평생을 바친 고 조자용 선생님의 글 중의 일부이다. }
 

무서운 장수도깨비들의 세계에는 그들을 통솔하는 장수라는 존재가 있다. 신라시대에 비형(鼻刑)이라는 장수가 도깨비들을 통솔하여 귀교(鬼橋)나 길달문(吉達門)을 건설하고, 여우로 변해서 도망가는 도깨비를 잡아 죽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런 양상을 잘 알려준다.

장수도깨비의 제도는 역사시대나 신화시대나 다를 것이 없으니 이제 그러한 장수도깨비를 신화시대로 올라가서 찾아보겠다.

하늘나라에서는 한웅천왕이 장수도깨비들을 통솔하여 천지를 개벽하고 3천무리의 장수도깨비들을 이끌고 땅으로 내려왔다. 규원사화(揆園史話) 태시기(太始記)에 의하면 한웅천왕이 신시(神市)나라를 다스릴 때 치우장수(蚩尤匠帥)를 하여금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치우는 실로 만고의 뛰어난 강용지조(强勇之祖)이며 하늘을 빙빙 돌면서 바람과 번개와 구름과 안개를 능히 부리고 칼, 창, 활, 도끼, 장창등을 처음으로 만들고 모든 벌레나 잡귀들을 처부시고 나라를 지키는 장수가 되었다」고 규원사화는 전한다.


오랫동안 잊어버렸든 민족의 벽사신을 찾게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을 끄는 점은 치우장수가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 뢰공(雷公)의 역할을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 하자면 풍운우뢰(風雲雨雷)의 4대 장수도깨비들을 치우장수가 다스리고 있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치우에 관한 모든 기록이 풍백, 운사를 대동하고 등장하는 점을 보아도 쉽게 납득이 간다. 중국인들이 오방신장의 중앙 신으로 황제를 모시는데 대하여 우리 조상들은 치우장수를 천하대장군으로 모셨든 것이다. 결국 문제는 치우와 황제의 대결로 도라감을 느끼게 된다.

다행이도 일지기 치우의 형상에 대해서 연구한 학자가 있으니 일본의 고스기 가즈오(小 杉一雄)박사가 바로 그 장본인 이다. 1965년 필자를 찾아주신 그분을 지금까지 스승으로 존경해온 것은 바로 치우에 대해서 깨우쳐 주셨기 때문이다. 1942년에 고스기선생은 「치우(蚩尤)의 형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사기 황제본기(史記 黃帝本紀), 한비자(韓非子), 관자(管子), 술이기(述異記), 금석색(金石索), 문선(文選), 동도부(東都賦), 용어하도(龍魚河圖), 봉선서(封禪書), 등 완전히 중국측 문헌을 위주로 논술하고 후한(後漢)대의 치우상으로 믿어지는 형상의 고증을 시도한 것이다.


그 논문내용을 정리해 보면

(1)치우는 천도(天道)에 밝았다.

(2)풍백, 우사(風伯, 雨師) 등을 통솔했다.

(3)오병(五兵)의 창시자다.

(4)흉폭한 반란자다

(5)치우의 형제는 72명(또한 기록은 81명),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 철석을 먹는다. 수신(獸    身)으로 인어(人語)하였다.

(6)치우는 구름이나 안개를 이르킨다.

(7)치우의 이발(耳髮)은 창칼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달렸다. 이빨은 두치(二寸)나 된다. 인신    우제사목육수(人身牛蹄四目六手)였다.

(8)치우는 난리를 잘 일으키고 헌원(軒轅)과 싸울 때 뿔로 떠받아서 아무도 저항 할 수 없    었다.

(9)탁록(??)전에서 황제에게 패하여 죽었다.

(10)강력한 무력의 보유자인 동시에 벽사능력의 보유자다.

(11)항제가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를 위협했다.

(12)기주(冀州)지방에서는 치우희(蚩尤?)라는 가면극이 성행했다.

(13)장안(長安)에 치우사(蚩尤祠)를 모셨고, 무기고(武器庫)에서도 치우제를 지냈다.

(14)사마천(司馬遷)이 시기(史記)를 편찬할 때 기왕의 기록들을 무시해 버리고 치우를 흉악한 반란자로 귀결 지었다.

이러한 중국측 기록을 토대로하고 벽사신상의 미술자료를 종합한 결과

(1) 치우는 한육조(漢六朝)시대 민간신앙에서 가장 유력한 신이었다.

(2) 벽사수 중에서 5종의 무기를 동시에 소지하고 있는 것을 치우상으로 본다. 무시사 후석     실 석각상(武氏祠 後石室 石刻像)이 대표적인 자료다. (註 41)

  1950년에 또 하나의 귀중한 연구가 발표되었으니 중국의 원가(袁珂)의 저서 중국고대신   화(中國古代神話)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산발적으로 문헌에 나타난 중국신화를 체계적   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신화 책이다. 광범위한 중국측의 문헌자료를 배경으로 치우에 대한    연구도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주목을 끈다. 그는 로사 후기4 치우전(路史 後記四 蚩尤    傳)을 인용하여 은(殷)대의 유물로서 가장 유명한 도철문(??紋)이 치우의 형상이라고 간   파했다. 동양미술사에 있어서 폭탄적인 선언이다.(註 42)

  이러한 현대적 학문의 결실로 이루어진 생생한 결과들을 요약해 보면

(1) 황제가 치우상을 그려서 벽사신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동양의 벽사미술이 치우상으로 부     터 시발되었다는 사실을 발굴해낸 것이다.

(2) 중국 고대문화를 대표해주는 주은(周殷)대의 도철문(??紋)의 정체가 치우상이란 점이      드러났다.

(3) 진한(秦漢)대부터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부적화로 사용하는 민간풍습이 유행했다.(註      43)

(4) 반란자로 사기(史記)에서 낙인이 찍힌 치우가 민간에 있어서는 꾸준하게 「세상에서 제     일 무서운 장수」로서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치우제를 지내왔다.

(5) 중국이나 일본학자들의 치우연구는 동국(東國)에 있어서의 치우장수의 위치를 포착하     지 못하고 중국문헌 일변도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치우장수의 후손의 입장에서 새로운 연구를 확대시켜 나아가야할 때가 왔다. 규원사화(揆園史話)가 인용한 중국계문헌을 검토해 보면 저자 북애자(北厓子)가 매우 정확한 한자였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그는 헌원기(軒轅記)를 인용하여 「치우씨가 처음으로 투구와 갑옷을 만들었는데 옛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치우상의 귀면이 치우의 가면이라는 고대 학설이 발견된 것이다. 치우장수는 모든 기록이 말하듯이 무장(武將), 군신(軍神)인 동시에 동양에서 처음으로 병기를 만든 장사(匠師)이기 때문에 치우장수(蚩尤匠帥)라고 불리운다. 치우상의 가면설은 꼭 영국의 아사왕(King Arther)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맺는말

한 종교에 있어서 그 종교미술은 신앙의 대상을 조형화 시켜 실질적인 신앙분위기를 조성한다. 불교의 불상(佛像)이 바로 그것이요, 도교의 수성 노인상(壽星 老人像)이 그것이요, 유교의 성인상(聖人像)이 그것이요, 예수교의 십자가가 그것이요, 무신(巫信)의 신장상(神將像)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추구해 온 벽사신상은 그 어느 특정교에 속하는 종교미술이 아니라 어느 종교에서나 받아 드렸든 공분모적인 벽사미술이다.

인류의 벽사 미술속에서 동양인들은 귀면상(鬼面像)을 그들의 이상적인 벽사신상으로 모셔 오면서 적어도 4~5,000년에 달하는 벽사미술사를 이룩하였다. 이 귀면의 정체는 어느 특정신의 얼굴이 아니라 동양벽사상의 이상형이며 표준형의 장수도깨비상(鬼面?邪像)이다.

그 연원은 치우장수의 가면에서 기원했고, 황제는 그것을 치우상(蚩尤像)이라 하여 장수벽사미술을 창안했고, 은,주(殷.周)의 제왕들은 도철문(??紋)으로 크게 발전시켰고, 전국시대나 진(秦)나라 때에는 반와당(半瓦?) 무리나 치우 부적으로 적용하다가 한(漢)나라 이후에는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 사기(史記)가 나타나면서 민족적인 편견에 의하여 치우신앙이 사라지고 치우를 중국사에서 반란자로 모라 붙이는데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믿어진다. 한(漢) 이후에는 수각(獸脚), 수환(獸環), 수지주(獸支柱)등으로 탈락했고, 불교전래 이후에는 도깨비상이 지옥의 라졸(羅卒)의 꼴로 격화되고 심지어는 사천왕(四天王)에게 집밟히는 사귀(邪鬼)의 처참한 꼴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 신라를 통해서 장수도깨비상은 망와(望瓦)의 형태로서 지붕위에 자리 잡으면서 크게 발전되었고, 장승의 형태로서 민족적벽사신의 모습을 지상에서 전승해 왔다.

도깨비=치우장수의 일치 사상은 호랑이=단군 산신과 병행되고 있으며, 그 미술사적 자료들은 신비의 단군문화의 맥을 파악하는데 크게 이바지 할 것이다.


<註>

註1. 조자용, <벽사의 미술>,≪건축사≫, 대한건축사협회, 1970-5

註2. 조자용, <민화의 마음>,≪미조의 미≫, 일본고단샤, 1970

註3. 조자용, ≪한얼의 미술≫, 에밀레박물관, 1970

註4. 조자용, ≪한호의 미술≫, 에밀레박물관, 1974

註5. 조자용, <도깨비의 불심>,≪법주회보≫, 법주사, 1985-1

註6. 무라야마 치즁, ≪조선의 귀신≫, 조선총독부, 1929

註7. 에밀레박물관, ≪호랑이 사절단≫, 에밀레박물관, 1981

註8. 조자용, ≪Korean Folk Painting≫, 에밀레박물관, 1976

註9. 노지리 호에이, ≪별과 동양미술≫, 항성사후생각, 1946

註10. 야기 쇼자부로, ≪만주 고고학≫

註11. 김혁제 편, ≪불경보감≫, 명문당, 1965

註12. 조자용, ≪한얼의 미술≫, 1971

註13. 한단고기

註14. 조자용, ≪Guardians of Happiness≫, 에밀레박물관, 1982

註15. 이백, ≪태백일사≫

註16. 고스기 가즈오, <귀면문>, ≪일본의 문양≫, 사회사상사, 1969

註17. 조자용, ≪한호의 미술≫, 에밀레박물관, 1974

註18. 조자용, <벽사의 미술>, 같은책

註19. 조자용, ≪한호의 미술≫, 같은책

註20. 자자용, ≪한호의 미술≫, 같은책

註21. 곽 박, 산해경

註22. 석일연, 삼국유사

註23. 윤세복, <단군고>,≪학술지≫, 건대사, 1959

註24. 북 애, ≪규원사화≫

註25. 북 애, 같은책

註26. 대야발, ≪단기고사≫

註27. 고스기 가즈오, 같은책

註28. 노지리 호에이, 같은책

註29. 조자용, <도깨비>, ≪서울평론≫

註30. 조자용, <도깨비>, 같은책

註31. 손진태, <중국에 전한 조선 설화>,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4

註32. 야나기 소에쯔, ≪민예도감≫, 보문관, 1960

註33. 조자용, <일본으로 간 도깨비>, ≪서울평론≫

註34. ZoZayong, <Humour in Korean Art>, ≪Korea Review≫, UNESCO

註35. 나가 히로, ≪육조시대 미술의 연구≫, 미술출판사, 1969

註36. 우메하라 스에지, ≪조선 고문화 총감≫, 양덕사, 1966

註37. 바바 아끼꼬, ≪오니의 연구≫, 삼일서방, 1971

註38. 아베 가즈에, ≪요괴한 입문≫, 웅삭각, 1967

註39. 석일연, ≪삼국유사≫

註40. 북 애, 같은책

註41. 고스기 가즈오, <치우의 형상에 대하여>, 1942

註42. 원가, ≪중국 고대 신화≫, 미즈미서방, 1960

註43. 카이즈까, ≪중국의 신화≫, 축마서방,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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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문화를 보는 관점과 문제점

문화관련글발 2006/06/24 00:26
 

                       

원형문화를 보는 관점과 문제점


                                                      안 종 수



현재를 사는 우리의 주위에 어렵지 않게 보여 지는 과거의 문화적 흔적과 상징물들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지 알고 있다.  피상적으로는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가지는 기호체계와 상징성의 의미는 알기는 어렵다. 과거부터 우리민족에게 쓰여 지면서 굳어진 언어 형태에는 과거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나 민속 문화의 경우 작게는 일국을 넘어서 전 세계 까지 공통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사실에 놀라는 경우가 있으며 전혀 이질적인 문화 형태도 바라보게 된다.

특히 신화의 경우 동일한 해부학적 구조를 가진다고 신화학자인 조세프 캄벨(Joseph Campell)말하였지만 비슷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문화사적 배경에서  사회 경제적 시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같을지라도 관념적인 이념적 의미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 민족은 작고 문화는 크다, 역사는 짧고 문화는 길다”1) 라고 최남선의 경우  당시에 민족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대동아 공영론에 이용되는 배경으로 작용 되었지만 일국의 사회진화론적인 방법론이 아니고 거대한 문화적 공유로서 불함문화의 연구는 현재적 시점에서 다시 연구되어야 할 필요는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많큼 문화는 다양성속에서도 일국의 차원을 넘는 동질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 근접에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상고대사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루기까지 많은 문화적 충돌과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문화적 양태들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당시의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야 하며 그들의 언어체계로 문화를 바라보아야 하는 시각이 있어야한다.

언어학 즉 당시의 언어체계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바로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반영하고 그 사고를 잉태시킨 문화의 구조, 집단의식이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의 형태를 잘 나타내 주는 가장 엄밀한 화석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그들의 세계를 바라보았던 고유한 양식을 가지고 상호 소통하였으며 그러한 의식체계에서 상징물들을 만들어 내고 표현하였음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양태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발전한다.  인도의 경우도 희랍이나 회교문화, 유럽 등 타문화로부터 얻은 것이 있는 반면 다른 나라나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영향을 준 것이 오히려 받은 것보다 더 크다2)하겠다.


우리는 인식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고유문화라는 문화적 유산들이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양태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百聞이 不如一見이 아니고 百見이 不如一讀 즉 백번 보아도 문화의 대한 인식이 없으면 백번 보아도 소용없다고 할 것이다.  원형문화를 놓고도 사람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듯이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적인 연구에서도 통일된 관점과 과학적인 해석이 부족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도깨비연구라 하겠다.  수천년 기간의 역사속에 우리 민중들과 그동안 함께 해온 도깨비가 아직까지 도깨비 어원3)의 연구 및 치우와의 관계에 있어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으며 이것은  벽사신앙으로서 도깨비와 기복적 의미의 왕도깨비의 연구들을 가로막고 있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장승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도깨비 연구는 단순히 어원적 추론 속에서 그것을 민속학적으로 밝히는 문제가 아니고 좀 더 포괄적으로 우리민족에서 있어 도깨비의 의미와 아울러 더 나아가  문화사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나타나고 있는 동일한 문화적 양태들을 연구하고 당시의 살아갔던 사람들의 입장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동안의 연구들을 분석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밝히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도깨비 연구에 있어 중요한 문제점과  피해야 할 것들을 들라면 첫째가, 일본 도깨비4)와 구분을 통해 식민사관의 잔재로 보는 것과 치우와의 다른 우리민족의 고유의 벽사적 의미의 형태로 구분하려는  과거 중국의 모화사상속5)에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마고사상을 놓고 환단고기를 주축으로 하는 역사학자들이 치우가 동이족의 황제였다는 주장으로 현재 학계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오고 주장이다.


위의 주장들 역시 실질적으로 도깨비를 해석하는데 많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중 모두가 자민족적, 국가주위 틀 내에서 가두어놓고 문화적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 있어 일본과의 도깨비 연구 비교는 과거 최남선의 했던 불함문화론과 동일시하여 새로운 대동아공영권으로  중국의 비교연구는 모화사상이라고 몰아가고 있으며 이들이 듣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한반도,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실과 식민지 사관 철폐 인 것이다.  문화 특히 신화라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일국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고 크게는 각 지역에 공통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도깨비의 경우도 어는 시대 규정화 되어서 나온 것이 아닌 우리민족의 오래 역사 속에 만들어진 신화적 요소가 강하다.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공통의 사안이고 인간의 자연의 대한 경외감속에 만들어진 상징체계이다. 이것을 놓고 “도깨비는 우리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론적으로 일본이 했던 대동아 공영론과 무엇이 다른 가 이다.  우리는 도깨비 연구를 통해 문화론적 해석은 일국과 민족주의를 넘어 명확하게 하여야 하며 각 나라별로 존재하는 도깨비를 좀더 재조명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 그동안 도깨비 연구와 장수바위, 알터 등 삼신사상을 중심으로 연구하신 조자룡 선생님의 연구 역시 재조명 되어야 함을 밝혀 두고자 한다.  선생님의 경우 민속학적인 연구를 통해 현장조사와 실제적인 자료수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학문적인 성과물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또한 그러한 중요성을 인식 못하는 국내의 민속학계의 연구에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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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남선「조선문화의 본질」 9권 32쪽
  2)  이지수「인도에 대하여」24쪽  
  3) 현재 도깨비의 어원적 추론은 많이 나와 있지만 돗가비- 돗아비로 설이 규정 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돗’의 규정은 씨, 생산의 의미로 인식되지만 가비.아비, 개비의 규정은 아직까지
     의견이 많다.

  4) 김종대의 연구에서는  도깨비 뿔의 존재 유무를 놓고 일본의 오니와 우리나라 도깨비로 구분
  5) 주강현 , 『우리문화의 수수께끼』,한겨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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