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ㅣ라고 하는가?
문화관련 글들(ktp) 2007/10/24 22:02| 문화란 무엇인가? 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는가? 우리는 지금 문화라는 단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이 주요 이슈로서, 21세기의 세계적 과제로서, 한 국가가 이루어야 할 목표로서, 인생설계의 지표로서, 전문가들의 학술적 담론으로서, 그리고 평소 대화에서의 화두(話頭)로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엄청나다. 그것은 일상에서 심리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가 하나의 힘, 권력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일 수도 있고, 우리를 억압하는 힘일 수도 있다. 모더니티의 여명기에 “아는 것이 힘”이라 했듯이 포스트모던의 이론적 병앓이를 겪은 지금 “문화가 힘”이란, 의욕적이고 능동적 표현일 수 있다. 반면 문화라는 단어 자체가 대중에게 휘두르는 권력은 전체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에 우리는 수동적 피해자가 된다. 고대로 부터 명민한 인간사고의 기본과제중 하나는 한 사회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언어와 그 부수적 작용의 ‘올바른 비중’이 무엇인가를 검토하는데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대화 상대자들로 하여금 토론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술어를 다각적이고 지속적으로 정의해 가도록 끈질기게 유도하는 것은, ‘술어의 논리적 정의(定義)’에 이르고자 함에 그 근본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언어와 그 사회적 사용의 효과 및 그것이 지칭하고자 하는 현상이 지니고 있을 수 있는 ‘옳지 못한 힘’을 떨쳐내는 데 있었다. 여기서 ‘힘’이란 일반인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1. 문화의 개념적 특성 문화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문화 개념의 문제다. 문화는 이미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이지만, 그 다의미어적(多意味語的) 성격으로 인해 개념과 정의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통합적 의미에서 출발해 논지를 전개하기란 쉽지 않을 뿐더러 담론의 실용적 효과를 얻기 어렵다. 다만 상이하게 사용되는 정의들의 의미공통분모를 찾아 볼 수 있으며, 각 정의들의 연관성에 관한 분석의 과정이 곧 문화의 개념을 재정립해줄 수 있다. 문화에 ‘대한’ 담론은 문화라는 화두를 ‘통한’ 담론이라는 성격이 다른 어떠한 언어를 사용할 때보다도 강하다. 문화는 ‘대상 지칭 언어’라기 보다는 ‘방법 매개 언어’로서의 기능이 두드러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라는 말의 특징 가운데 매우 중요하면서도 쉽게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곧 자세히 살펴보겠지만(1.3.) 문화의 개념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중요 논쟁 거리였다. 그래서 이에 지친 학자들은 문화 개념에 관한 논쟁의 진부성을 지적하기도 한다(서구에서는 20세기 초에 이러한 경향이 크게 부각되었었다). 혹자는 “문화란 무엇인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사람의 지나친 천진성을 비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렵고 그 논쟁이 진부하더라도 이 문제를 끝까지 회피할 수는 없으며, 언제까지나 상식이 보장하는 묵계적(黙契的) 정의(定義)의 보호벽 안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소멸시키기 보다, 오히려 창조적 자세를 갖고 문제 의식을 유지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문화라는 말의 사용 빈도가 점점 영향력 있게 증가하고 있으며, 다른 단어들 보다 어의(語義)적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질문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일상적 욕구가 상존하는 한 완전히 유보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1. 문화라는 언어의 유형적 차이 먼저 문화가 다른 언어들과 유형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유형의 질문들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관찰해 보는 것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연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그리고 ‘문화란 무엇인가’ 연필은 협약된 언어로 지칭되는 대상이 곧 감지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감각에 의해 즉각적으로 확인 가능하며, 그 주된 기능을 간단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그 의미가 조작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연필의 역사에 대해 책을 쓰든, 연필이란 소재(素材)의 시와 소설이 은유를 극대화하고 다차원적 상징화를 시도해도 대상의 본질적 의미 소재(所在)는 혼돈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인간 자신의 끊임없는 질문이고, 사상가들의 저서와 논문의 주제이자, 유명 인사들의 강연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던짐은, 대상에 대한 협약 언어가 부재하거나 그 언어의 실체적 대상이 모호하거나, 아니면 대상의 실체적 감지가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때론 옆집 아저씨가 “인간적이지 못하다” 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즉각적 실체가 고양이나 소나무가 아니고 사람인줄 안다. 복합적 존재로서 인간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은 계속 남아 있으나, 인간이라고 하는 일차적 감지 대상의 실체가 없거나 다른 대상들과 현상적 혼돈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반면 경제는 만질 수 있는 즉각적 감지 대상으로서 실체가 아니다. 경제는 원천적으로 구체적 대상물에 대한 지칭 언어가 아니라, 일정 현상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다. 다시 말해, 그 언어 형성의 원천적 동기가 본질적으로 인식적(認識的) 욕구에 의한 개념화 작업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논리성과 역사성을 강하게 내포하며, 언어 사용자의 폭넓은 인식적 동의를 요구한다. 경제란 그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개념으로서의 자기 영역이 분명한 편이어서 여타 현상과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다. 재화, 상업, 금융에 관한 것이 경제 현상이라는 데에 즉각적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며, 선거와 정부 구성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 현상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따라서 상식적 맥락에서의 묵계적 정의(定義)의 보장도(保障度)가 높은 개념어(槪念語)이다. 다수의 개념어들, 예를 들면, 정치, 교육, 예술, 종교, 체육, 관광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문화도 일정 현상의 추상적 표현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유형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문화라는 개념어에 너무나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 아니면 최소한 이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어도,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이는 문화라는 언어의 표현적 특성 때문이다. 1.2. 문화라는 언어의 표현적 특성 언어 발달사적 맥락에서 문화라는 언어의 표현적 특성을 관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는 다의미어성(多意味語性)을 지니고 있고, 둘째, 따라서 문화는 묵계적 사용 정의의 보장도가 낮은 개념어이며, 셋째, 사용자의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그 뜻을 손쉽게 도구화할 가능성이 높은 단어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유가 주로 개념적, 어의적 문제라면, 세 번째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는 앞의 두 문제와 연계되어 있으며, 그 중요도가 그들에 못지 않다. 문화가 다의미어성을 지니게 된 것은 그 언어 변천의 역사 때문이다. 문화의 개념과 그 실용적 사용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좁은 의미의 개념’에서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그리고 다시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개념들이 소멸하지 않고 이후의 개념들과 공존함으로써 각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첫 번째 좁은 의미의 문화 개념은 고전적, 인문학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정신적 성장과 자기 실현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Paideia)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문화개념은 현대의 문화인류학과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로부터 나온 총체성(totality)을 바탕으로 하는 개념으로서 일정한 사회가 생산하고 축적한 모든 것, 더 나아가 일정한 인간 그룹에 관한 ‘모든 것’이란 의미가 강조되었다(이에 관한 이론적 실례를 들기란 어렵지 않다. 문화 개념이 일정 사회의 ‘complex whole’을 대상으로 함을 강조한 타일러(E.B. Tylor)의 말은 이미 인용구의 고전이 되어 버렸다). 이 경우, 총체적 성격의 문화 개념이 유일하고 지배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음으로 해서 얼른 보아 이론적으로는 다의미어성의 문제를 해결한 것 같다(전체는 개별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차피 각기 상이한 부분적 요소들의 집합’, 즉 ‘불완전한 전체’로 전체를 설명하고 표상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또 다른 양상의 다의미어적 문제를 가중시켰다(전체를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각기 다른 불완전한 전체가 난립하므로). 포괄적이고 완전한 인식과 설명을 위한 총체적 개념의 ‘개념적 실수’는 근본적으로 총체성의 의미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해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완전한 인식과 설명을 위한 총체성이란, 인식론적 의도와 인간의 지식취득을 위한 욕구이지, 그 총체적 개념이 현실적으로는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할 수 없음으로, 개념의 내용으로서는 오히려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갖출 수 없는 조건에서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모순적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문화의 주제를 일반화하는데 기여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의 지배적 문화 개념이었고, 문화에 대한 논쟁의 장을 여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재부상하고 있는(그 양상과 성격은 다르지만) 좁은 의미의 문화개념은, 창조행위와 생산행위로서의 문화가 강조된 후기산업사회 지식정보사회의 특징을 대변한다. 따라서 총체적 성격의 문화 개념으로부터 탈피하게 되고, 오히려 인간정신과 창조력의 중요성을 함의하는 고전적 문화 개념을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문화성이 경제성과 연합하는 시대에 문화의 어의적(語義的) 변신뿐만 아니라 권력적 전환을 꾀하게 된다. 바로 이 맥락 위에 ‘문화산업’과 ‘대중문화’의 주제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른바 고급문화 또는 상위문화로 대변되는 첫 번째 좁은 의미의 문화, 즉 고전적 개념의 문화는 정치성과 연관되어 있고, 넓은 의미의 문화, 인류학적 문화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적 과학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문화산업과 대중문화로 대변되는 지식정보사회의 문화는 경제성과 결합되어 있다. 즉 문화의 생산과 문화의 소비라는 문제는 점점 더 부각될 것이다. 앞으로의 문화연구에서 이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상의 대화에서 묵계적 사용 정의의 보장도가 낮은 개념이라는 문화의 두 번째 특성 또한 문화의 다의미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이것은 또한 문화란 화두가 담론과 토론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유효한 개념’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소위 상식적 ‘최소 정의’에 대한 협약을 이끌어 내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문화의 개념화 작업은 다양한 이론적 요소를 자신의 개념적 구조 안으로 유도하여 논리적으로 재조합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적 총체성’으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이론적 요구의 종합적 연결점’으로서 문화개념의 역할을 의미한다. 언어 사용의 도구화는 권력관계 형성과 직결된다는 면에서 적지 않은 사회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한 언어의 각기 상이한 뜻은 개념의 혼돈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일정 행위에 대한 의도적 가치부여를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문화의 경우 그 고전적 개념이 아직도 ‘사회적 특전’과 ‘도덕적 위신’을 함의하고 있어서,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조작되고 도구화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문화 개념이 사회 특전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고전적 의미의 문화가 제한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향유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 개념이 내포하는 ‘교양인’이란 의미적 요소 때문에 ‘문화인’은 도덕적이라는 고정 관념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고전적 도덕성과 문화 개념의 연결 고리는 느슨해진 것 같으나, 문화라는 말이 지니는 사회적 가치는 유지되면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문화의 개념은 한편으로 문화라는 단어 사용의 대중화로 그 의미가 가치중립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점점 더 ‘가치 개념’적 성격을 띠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내세우는 ‘문화의 세기’, ‘이제는 문화다’ 등의 구호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문화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문화개념의 문제이다. 물론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가 이야기했듯이 개념은 물체를 단번에 베기 위해서 날을 세우는 연장과 같지 않으며, 니체(F. Nietzsche)의 말처럼, 어의(語義)적으로 현상의 총체적 과정을 모두 조합하려는 개념들은 완전하게 정의되어질 수 없다. 개념은 현실의 이론적 숙소일 뿐이며, 개념의 집은 현실에겐 너무 비좁다. 따라서 한번 지어진 개념의 집에 현실이 머무는 것은 일시적이다. 현실을 새롭게 맞기 위해 개념은 자신의 집을 지속적으로 개조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 앞에 선 개념의 운명적 변모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현실이 영원히 안주할 완벽한 집을 짓는데는 항상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은 다른 개념적 가능성들을 갈구한다. 그리고 한번 설정된 개념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공개하며, 지속적으로 ‘대화의 장소’와 ‘논쟁의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1.3. 서양 현대사상사의 거울 문화 개념의 변화 추이에는 현대 서양사상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문화의 정의와 개념들은 바로 현대 사상의 특성을 대변한다. 물론 시대마다 새로이 부각되는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와 이론화 작업이 있어 왔으며, 이것은 역사의 진행에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이성의 과업이기도 하다. 일정 언어의 역사적 발전 과정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고전적 개념과 새롭게 이론화 된 개념 사이에서, 그리고 전통적 의미와 진보적 의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론적 충돌’과 ‘대조적(對照的) 차이점’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그 같은 변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탐구 태도는 특히 문화와 그것의 개념화 과정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문화의 개념화 과정에는 구체적으로 서양사상의 ‘인식론적 투쟁의 역사‘와 ’인간관 및 세계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충돌, 대조, 투쟁 등의 단어는 ‘이분법적 구조’를 연상하게 한다. 아직도 인간의 사고는 ‘이항대립적’ 인식의 틀을 못 벗어난 것처럼 보이며, 앞서 언급한 사상과 개념의 변화 추이 역시 이러한 틀 속에서의 진행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개념화 과정에서 부각된 명제들의 대립적 구조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절대와 상대, 이상과 실제, 관념과 경험, 일체성과 복수성, 일원화와 다원화, 선별과 개방, 차별과 평등, 중심과 변방, 상위성과 하위성, 귀족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 정신과 물질,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목적과 수단, 인본주의와 과학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적 상황은 단순하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 지속적인 투쟁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그것은 ‘문화’라는 언어 자체가 바로 점령하거나 방어하여야 할 직접적 전투의 장소였기 때문이며, 문화의 주제화를 통해 지적 헤게모니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의 이름’으로 상이한 이념들이 각기 주장되고 이를 위한 이론화와 실천 전략이 세워졌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이러한 경향을 주도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과 이에 연관된 제학문, 특히 문화인류학의 발달이었다. 철학자 바티모(Gianni Vattimo)는 ‘문화인류학의 탄생’을 ‘군중 사회의 등장’ 및 ‘과학적 기초의 위기’와 함께 20세기의 실존주의를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으로 꼽기도 한다. 현대의 문화인류학은 자신의 연구대상을 규정하기 위한, 그리고 과학으로서 자신의 자율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서 문화의 개념화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적 성장 및 자기실현이라는 이상과 가치를 함의하는 고전적 개념을 표상하기 위해 사용된 문화라는 언어를, 초창기 문화인류학자들이 일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취득하고 생산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탈이상적이고 몰가치적 개념을 가리키는 용어로 택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문화의 개념에 복수적, 다차원적, 상대적 요소를 도입한 이 새로운 인간 과학의 특성은 물론 19세기의 다른 근본적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특성이 형성된 것은 중세적 보편주의의 분명한 위기, 민족주의의 급속한 전파, 근‧현대의 지리상 발견의 구체적 여파, 경험주의의 지속적 확산 등과 연관하여 고찰될 수 있으며, 타문화와 접촉을 통해 서구인들의 ‘자기 비판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시기와 맞물려 있다. 또한 인류의 삶의 형태가 복합성을 띄게 된 데에도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실존의 형태에서 매우 복합적인 삶으로의 전이는 현실의 이해를 위한 통합적 지식에 대한 욕구를 낳게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근대적 삶의 모든 복합성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을 찾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학적 또는 과학적 문화 개념의 또 다른 측면들을 보여준다. 첫째 고전적‧인문학적 개념의 주된 관심이 이상(理想)적, 규범적, 목적론적인데 비해, 인류학적 개념은 본질적으로 ‘지식(知識) 추구적’이다. 둘째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1.2.) 총체적 성격의 개념이다. 이는 방법론적으로 총체적 접근이라는 단순 사고이든, 문화현상 이해의 전제(前提) 이념으로서 총체성이든, 상이한 요소들의 인식적 가치를 각각 인정함과 동시에 접합하고자 하는 의도의 표시인 것이다. 따라서 서양사상사의 맥락에서 보면, 문화의 이념은, 19세기 중반부터, ‘인간관과 세계관 형성의 근본적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의미성(多意味性)을 포함한 문화 개념의 제 문제는 분화된 각 학문이 나름대로 통합적 지식을 추구하는 발전 양상 및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역사적 특성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이론화 작업을 위한 언어 차용의 관점에서 볼 때에, 문화 개념의 역사는,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이념을 품고 있는 이론의 발전사이다. 다시 말해, 이런 전환기에 이루어진 문화의 개념은, 이미 일정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았지만, 새로운 ‘이론적 입장’과 ‘지식의 창출’을 위한 이른바 ‘과학적 구성’의 개념임을 주장한다. 물론 ‘입장의 주장’을 위한 ‘언어의 차용’은 단순히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이론화 작업을 위해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의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문화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이념적, 방법론적 전투의 결과는 그 어느 쪽에도 결정적 승리를 안겨 주지 못했다. 따라서 문화라는 한 단어를 통해 나온 상이한 이념적 의도(意圖)의 두 목소리는 현실에서 그 단어 사용의 이분화를 초래했다. 이것은 오늘날 일상적 사용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인류학적‧과학적 개념의 문화는, 자신의 본질적 총체성으로 인해, 다른 형용사적 접두어에 의해서 구분성과 영역을 획득하는 명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정치문화, 정신문화, 물질문화, 군대문화, 예술문화, 출판문화, 고급문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외형상 일정 ‘분야’에 의해서 한계가 지워지는 수동적 의미어가 되어 고유의 의미를 상실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 고전적‧인문학적 개념의 문화는 고유의 가치 개념적 성격을 유지하여 일정 명사에 가치론적, 목적론적 의도를 부여하는 형용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문화유산, 문화수준, 문화정책, 문화교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 명사에 능동적 ‘의미부여’를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적 구분은 일차적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주변상황의 변화 추이를 정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식론적 기준과 세계관 형성을 위한 ‘인간 사고의 역정’을 동반자적 자세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뿌리깊은 곳까지의 관찰이 요구된다. 이러한 관점은 문화의 개념과 존재론적,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여타 개념들을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 그 대표적 개념이 사회이다. 다시 말해, 문화와 사회의 개념적 구분성과 연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문화의 세기’에 맞는 ‘관계의 위기’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이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유난하다. 우리는 새 세기를 맞이하기 전인 20세기 말부터,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구호처럼 외쳐댔다. 그런데 문화의 세기가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 무엇인가? 아니면 문화의 세기의 도래와 함께 우리 삶에서 변해 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문화의 세기와 함께 온 것은 ‘관계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즉 사람 사이의 관계에 다양한 위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성과가 부상하면서 사회적 관계에 급격하고 다양한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와 사회가 조화로운 공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한 갈등의 상황에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인터넷 문화의 확산은 부부 관계, 세대간의 관계, 부자와 빈자의 관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 등에 위기를 가져 왔고 우리는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는 당연히 문화와 사회의 개념과 그 현실적 의미에 대한 재조명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사람들이 이론적이라고 외면하기 쉬운 개념 천착의 실용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도 하는 사회와 문화라는 말의 개념 형성 과정에서 인간관과 세계관 변화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날 ‘문화의 세기에 맞는 관계의 위기’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과제다. 2.1. 인간은 사회적 동물? 우리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현대적 이성의 그 못 말리는 의구심과 해체 작업으로 진리라는 신화는 더 이상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대에도 이 말은 ‘진리’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조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것도 이제는 상식 수준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말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했을까? 그가 자신의 정치학과 윤리학 저서에서 인간을 수식하기 위해 쓰는 말은 주로 ‘폴리티콘(politikon)’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본성은 ‘폴리티콘 조온’(politikon zoon)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폴리스를 구성하며 폴리스에서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폴리스는 본질적으로 정치공동체이고, ‘폴리티콘 조온’을 직역하면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만이 자족(自足)의 능력이 있고, 각 개인은 물론 그 이하의 공동체, 예를 들어 마을이나 가족은 그 자체로 자족의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이런 소규모 공동체나 각 개인은 도시-국가 폴리스의 일원으로서 그에 참여할 때, 비로소 자족의 수준에 이를 수 있고 그것은 바로 행복의 조건으로 이어진다. 이는 공동체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갖는 정치 권력의 실체가 일상 생활에 침투하는 정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공동체에서는 오늘날 민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상당수 형법적 해결의 대상이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덕(德)을 논할 때도 그 덕은 주로 폴리스의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공인으로서 덕을 의미한다(이는 동양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유가에서 덕은 상당수 군자의 덕이고 군자는 공인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사상 역시 사회철학이라기보다 정치철학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인들에게는 다수 공동체로서 폴리스에서 정치성과 사회성은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현대인이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에는 정치의 영역에 흡수되어 있었다. 폴리스의 사람들에게는 ‘정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개인이나 가족 또는 마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개인은 우선적으로 자신과 폴리스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영어를 비롯한 현대 서구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에서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라는 표현들을 발견하는 것은 한편으론 번역 관습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으론 개념 적용의 문제이다. 물론 개념이 형법적인 것이 아닌 이상 ‘개념 불소급의 원칙’은 없다. 오히려 개념은 상당수 소급 적용의 원칙(?)을 따른다. 하지만 어떤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서 어디에 소급 적용되었는지를 아는 것과 그 적용의 정당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여기서 주지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회의 개념은 18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대와 중세사를 사회라는 화두로 조명하는 것은 차후에 형성된 개념의 소급적 적용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그 적용의 정당성은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이른바 ‘사회 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인간관계가 국가 개념에 의존하는 것에서 분리돼 인식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구체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만(Niklas Luhmann) 등의 사회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사회적 실존을 나타내는 공동체적 삶(koinonia)이 사회적 관계의 한 영역인 정치 공동체(koinonia politike)를 의미하는 고대의 전통은 이어져 왔고, 그것이 존재론적 윤리학적 우선권과 가치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사회적 성격에 대한 관찰과 이해는 정치 이론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인간 공동체의 의미가 기능, 구조, 과정, 정보, 행위 코드, 복합성 등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주로 공적 대인 관계, 법률, 제도 등의 개념으로 조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율적 영역의 현실’로서 사회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실재(實在) 자체에 대한 굳은 신념에 의해서 가능했다(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니? 지금의 우리로서는 우스울 정도의 일이겠지만, 서구에서 불과 250여 년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천착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사회이론의 실질적 발전을 위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회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한 터전을 제공한 제일 조건은 산업혁명의 강한 영향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국가에 대해 상당한 자율권을 가진 영역으로서 사회(구체적으로 Civil Society)의 개념이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시빌 소사이어티로서의 사회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국가와 구별되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의 총체적 영역에서 시민계급의 혁신적 정신을 표상하게 되었다. 이는 산업혁명의 영향과 시민계급의 부상이 ‘인간 관계에 개입하는 물질적 조건’을 새로이 형성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가 사회의 의미 있는 본질적 구조로 자리잡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적 사회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면서 지난 2세기 동안 ‘사회’라는 말은, 인간 현상에 관한 이론화 작업에서 현상 전체를 겨냥하는 개념이자 각 연구 분야의 지배적 개념이었다. 이것은 인식론적 관점에서도 지식의 근본적 비판은 사회이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 -단순히 물질적 생산의 증가 현상을 넘어서- 사회를 ‘인간 관계에 개입하는 물질적 조건’이라는 맥락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또한 사회 관찰에 있어서 법적 특성을 내포하는 정치적 요소가 약해지는 반면, 경제적 특성을 내포하는 문화적 요소가 강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인간이 정치적 동물에서 사회적 동물로 새로이 부상함과 동시에 문화적 동물로 각별히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물질론을 바탕으로 한 문화 의식, 산업으로서 문화, 대중 전달과 소비로서 문화는 이 때부터 싹튼 것이다. 통시적 안목으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는 ‘문화의 세기’의 시작은 18세기 후반에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서구에서는 -문화를 지속적으로 중요시 여기지만- 문화의 세기를 구호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유난히 구호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 역사 인식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2.2. 사회와 문화 문화의 개념은 문화인류학 용어로 정착하던 초기부터 사회의 개념 못지 않게 인간의 삶을 총체적 이념으로 묘사하고 분석하려 했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 들으면 이상하겠지만, 오늘날 문화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프랑스 학계의 일부에서는 불과 20세기 초까지 사회의 개념과 혼동된다는 이유로 문화라는 말의 술어적 사용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연관하여 인식될 수 있는 문화의 개념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문화라는 요소가 사회에 비해 인간의 속성을 더 잘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 외의 동물, 곧 벌이나 개미, 철새 떼, 늑대 무리 등 여러 동물 집단에서도 사회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지만(물론 여기서도 동물의 군집성과 인간의 사회성은 구별되지만), 문화적 성과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입장에서 우리는 사회로부터 구분되는 문화 개념의 기준이 ‘생산’을 비롯한 창조행위와 그 ‘성과’ 및 그것을 ‘즐김’에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산 활동과 연관이 있다. 쉽게 말해, 사람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과 연관이 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은 바로 사람의 삶에 개입한다. 따라서 인간의 생산물(창조물이라고 해도 좋다)과 그 생산물의 영향이 특히 오늘날 문화라는 말이 갖는 본질적 의미다. 우리가 오늘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인류학에서 인간 삶 전체와 동일시하는 총체적 의미의 문화 개념과도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고급 예술과 밀착된 고전적 문화의 편협한 개념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물론 고전적 개념도 창조 및 생산의 의미와 분리될 수 없다). 18세기 말의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생산물은 그 이전의 시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두면서 증가해 왔다. 그리고 이른바 후기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생산물은 양적으로 급증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하드웨어의 생산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창조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물과 함께 인간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의 문화적 삶을 살고 있다. 자동차와 비행기로 관광 여행을 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인터넷을 이용하고 이동전화로 대화를 한다. 그뿐 아니라 극장에서 영화와 뮤지컬을 보고 VTR이나 DVD플레이어로 다시 보며, 오디오 시스템으로 고전 음악을 듣고, 캐릭터와 콘텐츠라는 말이 친근해지는 등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이러한 의미의 문화적 삶은 대중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일상화되고 있다. 즉 문화산업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면서 고전적 문화의 대중화와 일상화를 포함하는 것이 오늘날 문화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오늘날 문화라는 유행어 때문에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역할과 의미다. 사회는 ‘관계’를 그 본질로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 말이다. 가정이라는 기초 단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부 사이의 관계와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를 비롯해, 좀 더 큰 인간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회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개념 형성의 역사와 논리적 구조로 보아, 사회의 개념은 ‘관계’의 요소를 본질로 하며, 문화의 개념은 ‘실현’의 요소를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생산의 맥락에서 보아도 사회의 개념을 통해서는 생산행위가 이루어 질 때에 생산주체 사이의 관계를 주로 관찰하려 하고, 문화의 개념을 통해서는 생산이라는 실현 과정을 주로 분석하려 한다. 이것은 서양어의 라틴어 어원에서 문화는 ‘경작(cultura)’이라는 뜻에서, 사회는 ‘동료(socius)’라는 뜻에서 유래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회라는 말로는 사람 사이의 관계, 체제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체제 사이의 관계를, 문화라는 말로는 생산을 포함하는 인간의 실현능력과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주로 의미한다. 그런데 사회와 문화, 즉 관계와 실현이라는 두 명제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매개(媒介)의 개념이다. 이것은 또한 현실적으로도 오늘날 사람 사이 및 인간집단의 관계는 문화적 실현 행위에 따른 성과물에 의해 끊임없이 매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문화 활동 자체가 인간 관계를 끊임없이 매개한다. 쉽게 말해, 문화 생산물은 인간 관계에 개입한다. 생산과 그 생산의 성과물로서 현대문화는 사람 사이의 사회 관계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나 인터넷처럼 물질적 성과를 그 기본으로 하든, 아니면 대중음악과 각종 퍼포먼스같이 예술적 성과를 기본으로 하든 문화적 실현은 사회 관계에 개입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사회 관계는 문화적 성과에 의해서 끊임없이 간섭받고 매개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동물의 군집성과 인간의 사회성을 구분해주는 것도 문화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매즐리시(Bruce Mazlish)는 인간이 군집성 동물들과 다른 사회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인간은 생물학적 유전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전도 가지며, 더 나아가 인간의 진화는 물리적이지 않고 문화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런 사회 문화적 진화의 특성을 자손의 번식을 통제하는 수단과 방식에서도 관찰한다. 다른 동물들도 새끼 살해 등의 수단으로 출생을 조절하여 개체 수를 통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만이 관습을 통해 출산을 조절하며, 낙태 기술과 문화적으로 발달시킨 여러 가지 피임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특유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문화적 질문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문화가 사회에 개입하는 구체적 예는 사회과학자들의 주된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포스트먼(Neil Postman)은 “서구에서 비생물학적 정보관리를 위한 제도로서의 가족은 인쇄술의 부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쇄술의 발달과 도서의 보급 확산과 함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한 책을 구해 볼 수 있게 되면서, 부모는 보호자, 후원자, 양육자 그리고 취향과 바른 판단을 유도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는 것이다. 즉 부모의 기능은 가족을 허물 위험이 있는 정보들을 가족의 영역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아이가 의당 어떠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포스트먼의 주장은 자신의 관점이 인터넷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물론 실현으로서 문화가 관계로서 사회에 개입‧간섭‧자극‧방해하는 매개 현상은 관계를 맺어주는 매개일 수도 있고 관계를 파괴하는 매개일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 보면 -이미 18세기에 칸트(I. Kant)가 간파하였듯이- 문화의 성과물은 사회성을 향상시키는 조건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적 판단이다. 인간 정신과 기술의 실현성이 고도에 이른 시대에는(지금보다 더 발달한 정보‧지식‧멀티미디어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지만) 문화적 활동의 결과는 매우 복합적일 것이고 관계를 매개하는 방식도 극도로 다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문화 연구에서 ‘관계에 대한 실현의 매개가 어떻게 최적의 성과를 얻는가’라는 것은 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문화적 입장에서의 성찰’과 ‘문화에 대한 사회적 입장에서의 성찰’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3. 시대와 위기 시간 숭배는 또한 시대 숭배를 가져오는데, 우리가 문화의 세기라고 할 때 우리는 한 시대를 단순히 특징짓거나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상징화한다. 바르트(Rolan Barthes) 같은 학자라면, 사람들이 그 상징성을 당연시하기 시작하면서 또 하나의 ‘현대의 신화’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얼마 전 어떤 대학 교수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필자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몇 년 전부터 문화의 세기라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문화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무슨 특별히 좋은 뜻이 있을까요? 그것이 정보지식사회의 발전과 연관이 있습니까? 문화로 돈 벌자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문화적이 되자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계속 물어댔다. 그는 지성인답게 범인들의 당연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질문을 잘 보면 어떤 형태로든 문화의 세기가 긍정적 가치일 것이라는 것이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특별히 좋은 뜻’, ‘정보지식사회의 발전’, ‘문화로 돈 벌기’(일종의 문화국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되기’(이건 고전적 문화 개념의 잔재다) 등 그리 부정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는 그 긍정의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답답한 것이다. 시대의 당연성은 그 의미와 특징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의구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넘어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문화의 세기라는 말을 할 때에,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말인데 안 그렇겠는가. 그런데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인터넷 중독에 의한 가정 불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휴대전화 사용 때문에 공공 장소에서 일어나는 시민들 사이의 갈등,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의 급속한 전이로 인한 문화 향유 방식의 불균형 등이 특히 우리나라에서 문화의 세기와 밀접하다는 것은 얼른 생각하지 못한다. 반면 어떤 표현에 문화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그것이 문화의 세기라는 우리 시대의 특징과 연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예를 들어서, ‘일본 문화 수입’이라든가, ‘문화 상품 개발’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이른바 ‘해리 포터 신드롬’이 문화의 세기와 밀접하다고는 바로 생각하지 못한다. 영국 작가 롤링(Joan K. Rawling)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도서‧영상 양 분야에 걸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에 각종 캐릭터 상품과 게임 상품으로 연계되는 것까지 합하면 그 문화적 성공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그 작품의 환상성 때문에 어른들조차도 현실도피 심리가 발동될 수 있고, 현실감이 결여된 아이들의 균형적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지나친 우려일지도 모른다. 해리 포터 책을 읽은 남편이 갑자기 아내에게 아이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나. 아니면 마법의 학교를 찾아 가출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일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 책을 사주고(그것도 시리즈니 계속 사주어야 한다) 영화 예매를 하고 캐릭터 상품을 사주기 위해 별도의 가계 지출을 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부부끼리 아니면 부모와 아이들이 다투는 경우도 자주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화적 ‘사건’들은 항상 관계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 생산물의 증가와 문화 교류는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기던 사회 관계가 문화적 매개로 인해 위기를 맞는 사태를 가져온다. 이에 더해서 우리나라에서 최근 몇 년간 ‘문화추종적 경향’은 ‘사회 관계에 대한 관심’조차 약화시켰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사회적 관계는 아직 전통적 틀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문화적 생산물은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라 주로 남의 나라에서 창조 발전된 것을 수입하는 입장에서 그 위기의 강도는 강하게 느껴진다. 그 가운데서도 각 세대간 괴리 현상과 빈자와 부자 사이의 문화 향유 불균형은 ‘관계의 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물론 문화적 매개에 의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부정적인 만큼 긍정적 모습도 많이 갖는다. 하지만 문화의 세기라는 말은 그 긍정적 대표성 때문에 부정적인 모습들을 감추기 쉽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기존의 인간 관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관계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람 사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위기가 온 것이다. 문화의 세기에 맞는 관계의 위기, 즉 문화력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성의 위기가 현재 우리의 위기인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새로운 성취를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 이런 지혜가 우리의 미래를 좀 더 평안하게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
원문 http://blog.naver.com/verthandi/8001581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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