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아홉번째 마당-동유럽의 향기 (불가리아의 카잔륵, 소포트, 소피아편 9/2-9/7) 불가리아의 플레벤에서 아침 8시 30분 버스타고 장미의 고장
카잔륵(Kazanlak)에 도착한 것은 낮12시가 다 되어서이다. 24레브(약12유로 정도)로 두 사람이 승차하였으니 대중교통 요금이 정말 저렴한 편이다. 카잔륵은 5월과 6월 장미의 축제가 펼쳐지는 곳으로 이곳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장미의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장미 몇 송이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장미 향수 한 병(약10ml)을 만들기 위해 장미 3,000송이, 그것도 새벽이슬을 영롱하게 머금은 장미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바리바리 짐 싸들고 오기 전에 이미 생을 마감한다. 장미 향수와 화장품, 장미 잎사귀를 이용한 술과 음료 등이 이 고장의 상징처럼 되어 있어서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 되어 있다. 
이 향긋한 곳으로 배! 째라 부부를 초대하신 분은 장미처럼 화려한 외양을 갖고 계신 분은 아니지만 장미를 능가하는 삶에 대한 붉은 정열을 간직한 불가리아 에스페란티스토 스보다(Svoda) 할머니이다. 지난 8월 루마니아 SAT대회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후, 그녀는 우리를 기꺼이 자신의 보금자리로 초대한 것이다. 고양이 7마리와 조니라는 멍멍이, 주렁주렁 사과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 정원 가득 과실수가 무성한 그곳에서
그녀는 자연처럼 살고 계셨다.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로 생글거리는 작은 두 눈과 성치 못한 치아
가득 머금은 미소, 검붉은 힘줄이 종아리 가득 얼키설키 엉켜 있지만
화끈하게 아픔을 뛰어넘는 그녀의 파안대소와 짓궂은 유머로 잠시도 우릴 잡념에 빠지지 않게 구원해주신다. 아버지가 불가리아 사회주의 체제에 맞서 투쟁한 전력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불가리아가 내일 멸망할지라도 외동딸을 위해 넉넉히 사과나무를 심어 놓으셨다. 그 사과나무가 지금 해마다 가을이 되면
아버지의 염원처럼 정원가득 일용할 양식이 되어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카잔륵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Thracian Tomb로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못지않게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세계 제1차, 2차 대전
공습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를 파다가 발견한 이곳은 천정과 기둥,
문 입구의 벽화가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소중한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카잔륵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 금빛 장식돔이 찬란한 Shipka의 성당은 터어키에 맞서 싸운 불가리아와 러시아 병사들의 유골을 지하에 간직한 채 세워진 유서 깊은 현장이다.
게다가 그곳 가까이에 모여 살고 있는 일본인 은퇴자들이 매일
매일 성당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깨끗이 쓸어주어서 불가리아 전국을 통틀어서
손꼽히게 청결한 장소라고 한다. 
9월 4일 새벽 5시 30분 기차를 타고 아침 7시에 도착, 이어서 버스타고
불가리아 전국 에스페란토대회가 열리는 스포트 (Spot)로 향한다.
오전 9시 개회식에 맞춰서 부지런히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주히 움직이는 이곳 분들의 정성이 대단한 것 같다. 어느 에스페란티스토는 이른 새벽이라 세수는 커녕 머리도 빗지 못한 모습으로, 뒤통수에는 커다란 까치집을 짓고, 겨우 눈꼽만 제거한 모습으로 나오셨다. 살루톤!!(안녕하세요!!)
오직 한 마디 던지고는 기차를 타자마자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 코를
골며 단잠에 빠진다.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또 다른 에스페란티스토는 로자랑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신세이다. 영어 교사인 그는 한국의 영화를 수입해서 자막에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부업 삼아 한다고 한다. 그 또한 오직 살루톤!! 한마디 한다. 근데 이들이 이른 새벽부터 기차타고 버스타고, 부랴부랴 에스페란토대회에 참석하는지 궁금하다. 단 두 사람만 모여도 불가리아 언어로 수다를 떨고, 오직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는 자리에 개밥의 도토리처럼 우리 부부가 낀 것은 아닌지 민망하다. 9월 4일 토요일, 약 150여 명 어르신들이 모인 제62차 불가리아 전국 에스페란토 대회가 불가리아의 자랑, 민족시인
이반바조프(1850-1921)의 고장 스포트(Spot)에서 열렸다. 
전국대회이니만큼 그해의 주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참석했는데,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신임회장 선거와
불가리아 에스페란토 협회 사무실에 컴퓨터 한 대 들여오자는
이야기가 주요 안건이다.
홈페이지도 없고, 전국대회 순서를 알려주는 안내장 하나 없이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괜히 온 것 같아 적잖이 후회가 된다.
유창하게 에스페란토를 구사하는 몇 몇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국어로 대화하는 그곳에 열혈 에스페란티스토가 아닌
로자가 끼기에는 정말 거시기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호기심 많은 여러분이 말을 건네 와도 살루톤과 자신의 이름 정도 외에는 더 이상 진행이 안되는 상황이 정말 답답하다. 그나마 불가리아 에스페란티스토로서, 사회주의 체제에 맞선 댓가로 오랜 유형 생활에도 올곧은 신념으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90세 고령의 아나키스트 알렉산더 나코브 할아버지를 만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천진난만한 미소와 편안한 얼굴이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해 한 치의 후회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리없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후 5시 대회 모든 일정이 끝났다. 저녁 8시부터 식사와 친교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장소를 옮긴다.
각자의 방에 배정이 된 곳으로 가보니 바로 여기서 학교괴담을 찍어야 제대로 그림이 나올 곳 같은 현장이다. 4명씩 배정된 방에 들어오자마자 모두들 샤워하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어떤 분은 샤워 할 시간 없다고 팬티만 수줍게 갈아입고, 쪼글쪼글해진 얼굴이지만 정성껏 그림을 그리고, 머리에도 빛나는 장식하나 얹어주고, 거칠어진 입술에
예쁜 장미색 루즈를 바르고, 마지막으로 향수로 마감을 한다. 넥타라는 이 고장 맥주와 강력한 브랜드, 감자와 치즈, 고기, 빵 등
식탁 가득 펼쳐진 음식과 술, 음악으로 벌써 친교의 밤은 후끈
달아오른다. 이브몽땅의 묵직한 음성으로 읊어주는 모나코와 Feelings 등 친근한 팝송이 더욱 달콤한 밤으로 모두를 안내한다. 아!! 드디어 로자는 알았다. 오직 살루톤 한마디 할지라도 식전 댓바람부터 이들이 왜 그렇게 부산한 발걸음을 옮겼는지를.... 틈만 나면 병든 닭처럼 졸던 바로 그 할머니가 이 밤을 위해
꽃단장하고 등장하신 것이다. 짙은 파란색의 빤짝이 셔츠에 눈처럼 새 하얀 빽바지, 까치집을 지었던 그곳에는 은빛 찬란한
구슬이 언제 그랬나는 듯이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왕년에 한 가닥들 했던 솜씨로 서로 어깨를 부여잡고,
굵직한 허리도 덥썩 휘감으며, 난리부르스, 올드 쌍쌍 광란의 댄스 파티가 열기를 더해간다. 이 손 저 손 요청으로 귀에 입이 걸린 이 분은 바로 오늘밤 직녀가 되어 수많은 견우들을 만나기 위해 오작교 미팅을 1년 꼬박 손꼽아 기다린 것 같다. 이미 110살을 훌쩍 넘긴 에스페란토이니 만큼, 연로한 희망동이들(어르신들)의 내 청춘 돌리도!! 몸짓이려니 하고 이해하려 애써 보지만, 뒷맛이 씁쓸한 것이 이번 불가리아 전국에스페란토 대회 참석은 잘한 결정이 아닌 것 같다.(불가리아 슬리벤 지부에서 초청받음) 공연 요청도 아프다는 핑계로 매정하게 거절하고 그 곳을 빠져 나오면서 점점 노화해가는 불가리아 에스페란토계의 회춘을 빌어본다. 9월 5일 일요일, 스포트에서 시내 버스로 이동한 카를로보(Karlovo)역에서 오후 1시 50분 소피아행 기차를 두 사람이 13.40Lev에 탔다. 마치 세계 1, 2차 대전을 다 겪은 듯 낡고 녹슬고, 의자는 푹 꺼지고, 유리창은 올라가다 말고, 가난을 주렁주렁 달고 가는 이 기차를 타고 덜컹 거리며 내린 곳은 소피아가 아닌 다른 곳이다. 모두들 짐 까지 챙겨들고 버스로 갈아탄다. 고속철로 건설을 위해
공사 구간 역 전체를 완전히 폐쇄해 버려서 그 지역은 버스로 이동시켜 준다. TGV 보다 더 잘 빠진 신형기차가 우릴
반겨준다. 불가리아에서 처음 만나는 청결한 기차이다. 와우~ 참는 자에게 복이 참말로 있나니... 광대한 발칸산맥을 따라 오후4시 50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도착하였다. 이름만큼이나 예쁜 도시일 것이라는 설레임에 피곤도 잊는다. 그러나 소피아도 이미 할머니가 되어 버린 듯 낡은 건물과 도로에는
잡초가 세월 무상하게 자라 있다. 시내 중심가 쉐라톤 워커힐호텔을 중심으로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과 전통을 간직한 예술품 같은 건축물들이 간신히 소피아의 아름다웠던 옛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지만 친절한 안내와 미소 속에서 불가리아의 희망을 보았고, 싸고 맛있는 과일과 알록달록 예쁜 꽃 속에서 불가리아의 향긋함을 느꼈다. 배! 째라 부부에게 있어 불가리아에서 보낸 약 30일은 초라했지만 편안했고, 소박했지만 진실하게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를 맛 본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