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마당 (동유럽의 향기-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편 7/26-) 
프라하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감하고 오렌지 버스를 아침 일찍
잡아타고 슬로바키아로 향하는 발걸음이 분주하다. 약 4시간 걸려
도착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의 첫인상은 아직은
촌티를 간직한 순박함이라고 해야겠다. 체코가 황금 박씨 물고 온 제비 다리 몽댕이 뿐질러 나날이
부자가 되고 있는 놀부 형이라면 슬로바키아는 양볼짝에
붙은 밥 한 톨도 소중히 먹을 줄 아는 흥부 같은 동생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심술 사나운 형은 옥토를 차지하고 조금은 미련하고
어눌한 동생은 황무지를 물려 받은 듯 시내 곳곳에서 보이는 낡고
초라한 건물들이 아직은 가난한 이 나라의 고단한 현실을
말해준다. 그런 상황과는 정반대로 더욱 순하디 순한 눈빛과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는 이곳 사람들이 피곤한 여행자를
안심시켜 준다. 택시비 계산도 한결 정직하게 거리에 따른 휘발유가격을 가늠해서
우리에게 요구한다.(5유로) 아이러니 하게도 프라하에서는 국경을
넘는 오렌지 버스 비용은 두 사람이 562체코 코루나인데 비해
호텔에서 이 버스 타러 가는 역전까지 약 15분여의 거리 비용은
470체코 코루나(20유로)이었다. 콜택시라는 특수한 요청이
있었기는 했지만 참으로 프라하의 물가가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브라티슬라바 시내 중심에 위치한 우리가 묵을 호텔로비에서의
무료 인터넷 접속은 정말 신선한 서비스였다. 체코 프라하를
비롯한 호주(주립도서관 제외), 태국 등 이전에 방문한
부자 국가들(슬로바키아에 비해서)에서 무료 인터넷 접속은
오직 거대한 맥도날드와 KFC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전 세계 곳곳의 요지를 접수한 맥도날드와 KFC의 마케팅 승리는
바로 무선 인터넷 접속 WIFI를 무료 사용하게 함으로써
여행자들에게는 꼼짝없이 방문하고 소비하지 않고서는 세상과의
손쉬운 소통을 힘들게 만든다. 울며 겨자먹기로 어느 지역이든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맥도날드와
KFC를 찾아보아야 하는 일이 중요한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 눈처럼 새하얀 털북숭이 할아버지의 새까만 잇속이여... 아~ 미소 띤 로고(M) 뒤에 숨겨진 진실이여.... 무료 WIFI의 유혹은 항상 배! 째라 부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맥도날드와 KFC를 가장 즐겨 찾는 곳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 바로 배! 째라 부부 아니여? 경우에 따라서는 구석탱이에 쳐 박혀서 일체의 소비도 거부한 채 오직 인터넷 접속과 작업에만 몰두한 채 그곳 점원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나가라고 하면 배! 째라고 반격할 태세를 갖춘 채... 가끔은 우리가 먼저 찢어질 듯 입가에 함박웃음을 띠우면서... 그들이 어색해서 말도 못 붙이게, 선수를 친다. 다행히 그 어느 곳에서도 눈총 한번 받지 않고... 아니다! 도끼눈 뜨고 날리는 눈총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
옳으리라... ㅋㅋㅋ
그래, 쌍눈총, 아니 따따따불 눈총 얼마든지 받아서
즐겨주마..ㅎㅎㅎ 배! 째라 부부의 의기양양 무료 인터넷 접속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로 이어진다.
오후2시 호텔 체크인이 시작되기 까지는 약 3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호텔 로비의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잠시 후 초록별이 선명한 에스페란토 깃발이 꿈결처럼
내 눈앞에서 펄럭인다.
깜빡 졸음으로 슬로바키아의 에스페란티스토 마리아가
흔드는 녹성기가 내게로 찬찬히 다가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살루톤!!(안녕하세요.) 로자. 미 에스 타스 마리아.(저는 마리아입니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등장한 마리아는 우리를 오렌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지쳐 이곳 호텔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다는 무성의한 메일에도 정성껏 우릴 위해
왕림해준 마리아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촉촉이 내리는 빗줄기를 헤치고 브라티슬라바 시내 산책에
나섰다. 연신 싱글벙글 웃음꽃이 가시지 않는 그녀의 얼굴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정 동생들 대하듯 친근하기만 하다. 화학교사로 퇴직한 마리아는 현재 에스페란토 무료 강습을 진행
하면서 후학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영어에
대한 열풍이 몰아닥쳐서 젊은이들이 에스페란토 학습에 그리
큰 호감을 보이지 않아서 슬프다고 한다. 그녀의 단순 명쾌한 논리는 영어는 신분 상승과 부를 가져다주는
사악한 요술주머니라면 에스페란토는 세상 사람들의 가슴과
가슴을 이어주는 신비한 마법의 주머니라고 강변한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던 사회주의 체제에 비해 일 할
능력이 없는 삶은 죽음과도 같은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남보다
더 잘해야만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현장에서의 영어는 윤택한
삶으로 이끄는 지름길인 것이다. 내리는 빗줄기를 피하지 않고 연신 대화를 나누며 브라티슬라바
골목 끝자락에서 들어선 곳은 지하의 동굴을 파 놓은 듯한
아담한 레스토랑이었다. 치즈, 감자, 소시지, 돼지고기 등이
들어간 이 지역 의 전통음식 브린조밴하우스키를 점심으로
주문하고 난 후에도 우리의 열띤 이바구는 끝이 없었다.
 정이 많은 마리아는 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불우한 사람들도
놓치지 않는다. 어린자녀와 함께 목청껏 노래 부르는 가난한
아빠의 애절한 구원에 화답이라도 하듯 작지만 소중하게 동전
하나를 정성껏 건넨다. 저들도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야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시내 중심가 한 모퉁이에서 꼿꼿이 서 있기도 불편한 장애
노인이 잡지책을 들고 서 있는 곳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조금이라도 풍족한 우리가 저것을
구매함으로써 그녀에게 작은 은총을 베풀자고 제안한다. 적어도 그들이 빈손으로 막무가내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팔고 당당하게 이윤을 취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자존심을 배려해주는 모습들이 더 없이 감동이다. 그들 모두와 우린 함께 살아나가야 할 인류라면서... 새삼 배 앞에 불룩하게 차고 있는 내 여행가방의 무게가
부끄러워졌다. 꽁꽁 숨어있는 여행경비와 카드가 가방 속에서
숨죽인 채 민망해서 얼굴 빨개 진 것만 같았다. 가난한 나라의 백성으로 더욱 못 가진, 아니, 도도한 자본주의의
격랑을 이겨내지 못한 이웃들에게 손을 내밈으로써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깨우쳐 주는 것 같았다. 이 가난이 당신들 탓이 아니라고.... 우리 모두도 당신들과 똑 같은 처지로 내몰릴 수도 있다고... 그러나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은 놓지 말라고... 아직도 브라티슬라바의 선량한 시민들은 당신들과
한 가족이라고...
소박한 점심 식사 후 함께 활동하는 에스페란티스토 요하노의
사무실로 우릴 안내하기위해 바삐 길을 나섰다. 그는 오늘이
다 가기 전에 꼭 만나야 할 에스페란티스토이다.
7월 31일부터 루마니아 브라쇼보에서 열리는
무민족성 세계에스페란토 대회(SAT)에 참석하기위해 거쳐서
가게 되는 곳곳에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많은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워서 슬로바키아에서도 1박2일 의 짧은 일정만이
잡혀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면 마리아가 서운해 할까봐 아직은 입속에
간직한 채 우리의 촉박한 계획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널따란 요하노의 사무실 벽에는 슬로바키아의 국기가 마치
정물화처럼 걸려 있었다.
전직 농림부 관리로 일했던 그의 경력을 살려 지금은 농업과 식량
관련 회사(Agriculture and Food Chamber)를 운영하고 있다. 브라티슬라바의 명물 주점(Pub)에서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자는 요하노의 요청으로 들어선 곳은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전통의 살롱이었다.
슬로바키아의 예술가와 문인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어 넣어 준 이곳은 200여년의 넘는 오랜 세월을 이곳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자리를 꽉 메운 곳곳마다 뜨거운 대화가 넘쳐나고 즉석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흑맥주가 묘한 향기를 풍기면서 우리의 만남을
축하해준다.
형 만한 아우 없다 하지만 슬로바키아의 소박한 사람들의 자랑은
탐욕스런 놀부형을 부끄럽게 만드는 흥부의 순수함이었다.
다음날 아침, 왜 이렇게 일찍 이 나라를 떠나느냐는 마리아의
원망을 뒤로 작별을 고하는 우리의 코 끝도 찡하다.
친정 동생들 멀리 떠나보내는 것처럼 마리아의 울먹임이
우리의 눈을 촉촉이 적신다.
단 하루의 만남이지만 만리장성을 쌓은 것처럼 견고하고 튼튼한
우리의 믿음과 마리아와의 우정이 동아줄처럼 질기게 이어지길
바라면서 눈가의 이슬을 닦는다. 정겨운 흙 향기가 풍겨나오는 듯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뒤로하고 헝가리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리아와 요하노의 선한 기운을 받아 상쾌하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