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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시대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다중들의 시간
문화관련 글들(ktp) | 2008/03/08 01:19

제국 시대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다중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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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ubStance> 112호, 통권 36권, no. 1, 2007년.

저자 : Antonio Negri

영역 : Max Henninger

번역 : 은혜(irreducible@naver.com)/승준(redsboy@hanmail.net)

링크참조 : http://muse.jhu.edu/journals/substance/toc/sub36.1.html

http://korotonomedya2.googlepages.com/AntonioNegri-ArtandCultureintheAgeof.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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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비판은 자주 그 자신을 반복한다. 우리의 현 정세와 관련해 그렇게 문화비판을 반복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면 잘못된 일일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7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ꡔ계몽의 변증법ꡕ을 출판하자, 새로운 비판모델은 재생산이 가능하고, 또 상이하면서도 반복이 가능한 독특한 형태로서 출현하게 되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들이 한 때 머물렀던 파시즘으로 폐허가 된 유럽과, 그들이 망명지로 택한 미국사회 모두를 반성하면서 계몽의 경향이 스스로를 자신의 대립자로 변형시킨다고, 즉 새로운 문화산업의 유혹으로 양산된 대중들을 파시즘에 무방비상태인 야만족으로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의 신민으로도 변형시킨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파시즘과 미국의 상품화가 공존한다고 간주되었다. 그 뒤부터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부터) 오늘날까지 서구문화에 대한 그러한 판단은 제국의 점진적 구성으로 확신을 얻게 되었다. 파시즘의 문화상품화로의 변형은, 텔레커뮤니케이션 체계들이 그러한 변형을 확산시키는 주요도구가 됨에 따라 전지구를 가로질러 퍼지면서 깨지지 않는 연속성으로 실현되었다... 이미지들의 가공은 보편적인 관광매춘1)과 수많은 다양한 악취미를 야기했다. 루퍼드 머독의 텔레비전을 생각해보라.2) 그러면 당신은 아도르노의 문화비판 모델이 새로운 세계의 존재론을 제대로 폭로했다는 것의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파시즘으로의 재구조화, 전쟁에 의한 세계의 재구축, 타락한 이미지에 의한 세계의 부패. 이 모든 것이 오늘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텔레비전은 쓰레기 문화를 생산하고, 특유의 청중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게 되었다! 뮤지컬 문화는 새로운 쓰레기 생산물들을 요구하고, [이러한] 순환은 완전히 닫혀 있다. 정보의 중립화는 정동의 평준화라는 동일한 법칙들에 의해 야기된다. 만일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모두 의미 없는 기호들로 환원되었다면, 이제 진리는 강제된 것 혹은 저속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모델은 자신을 소진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의 문화비판이 담고 있었을 혁신적 요소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는 진부한 것이 되었다. 분노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문화비판이 필연적으로 반복적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화를 지구화하고, 동시에 문화가 자신의 가치들을 황폐화하고 왜곡하는 이러한 지옥-기계 안에서, 그리고 그 지옥-기계에 대항하는 하나의 유령, 하나의 반란의 정신이 있다. 문화적 커뮤니케이션의 회로가 완전하고 자족적인 반면, 이 반란의 정신은 자신에게 외생적인 것과 타자를 공급함으로써만 전진할 수 있다. 육체적 욕망, 다중들의 자유, 언어들의 역능.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끔찍한 추상 속에서 무엇인가가, 즉 다중의 정신이 자신을 주체화한다. 왜곡된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누군가는 진리의 단순한 기호들을 생산한다. 바스키아3)를 생각해보라, 그의 순진무구한 기호들을, 유토피아적 묘사들을... 생산은 언어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주체성은 이제 자신을 언어 자체를 통해 제시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추상은 특이성들의 몸이 된다... 따라서 다중이 탄생된다.


2. TV는 보이는 세계를 경영자의 이미지로 혹은 명령 기능 일반의 이미지로 재구축하려 한다. TV은 아래를 향해 상호작용한다. 즉 지배하기, 분해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 아래에 놓인 것을 생산하기. 전쟁들은 실재의 혼탁함(obfuscation)에서 전지구적 판타지들의 서사까지를 포괄하는 언어로 다시 묘사된다. 전쟁 다큐멘터리는 비디오 게임이 된다. 하지만 다중이 삶의 중립화 내부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모든 추악한 구성물은 도살장 안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즉 권력에 의해 다시 묘사된 진리에 대한 다중스러운(multitudinous) 분해에서 시작되었다. 아주 소수의 사진기사들, 그리고 이따금씩 철학적 마인드를 가진 병사들은 전쟁이 퍼뜨린 피와 눈물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때 이래로 탈신비화의 메커니즘들 및 세계를 그것의 생생한 직접성 속에서 포착하는 능력은, 유행병과 같이 격렬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들이 되었다. 반G8 시위 동안의 제노바를 생각해보라. 경찰은 평화로운 시위자에 맞서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용해) 그들을 테러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저강도의 전투를 수행했다. [하지만] 그건 헛된 일이었다. 다중은 경찰보다도 더 많은 카메라를, 그것도 셀 수 없이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암살자라는 이미지가 모든 집집마다... 익숙한 것이 되었다. 다중은 자신들의 이미지 생산 능력으로 기호들의 추상을 반항적이게 만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세계는 그것을 해석하는 것만으로 변혁될 수 없었다. 아도르노가 파시스트들로 규정했을 법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의 의해 전유된 최후의 철학적 기획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턱수염이 수북히 난 어떤 옛날 사람[맑스]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은 그것의 변혁에 있다. 만일 이것이 우리가 도착한 지점이라면, 계몽의 변증법은 결국 소진되었고, 반복적인 이미지들(“역사는 끝났다”)이 자본주의적 생산 속에서 소멸했으며, 새로운 욕망의 생산으로 대체되었다. 상품화된 바로 그 커뮤니케이션의 추상은 다중들의 주도적 활동 덕분에 이제는 구제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도르노여 안녕, 리얼리즘과 근대적 비판모델의 반복이여 안녕. 여기에서 문화비판은 자신을 새로운 영역으로, 즉 다중과 탈근대성의 영역으로 확립한다. 다중은 더 이상 유토피아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스토피아4)를 생산하는 것일지 모른다. 즉 그 내부에 남아있는 능력, 언어를 내부에서부터 공동화(空洞化)하는 능력, 그리고 변혁을 위한 물질적 욕망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출현한 것이다.


3. 다중들의 디스토피아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정치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문화가 현재 자신을 구조적으로 조밀하고 생동감있는 형태로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즉 삶-권력과 대립되는 관점으로부터 지배와 폭력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변증법 혹은 높은 것과 낮은 것 간의 대립의 변증법과 동일시될 가능성이란 없다. 다중은 새로운 언어적 규정들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증식하는 특이성들의 앙상블(ensemble)5)이다. 자신의 고전적 형태 속에서, 변증법은 일자로 후퇴하지만, 새로운 변증법은 카오스적이다. 다중들은 언제나 제 때가 아닌, 예외적인 클리나멘에 따라서 마주치는 원자들의 앙상블들이다. 따라서 삶권력의 구조들 내부에서 사는 것과, 자유롭게 그리고 적대적으로 그 구조들을 삶정치적 주체들로서 옮겨 다니는 것, 이 양자의 대립에는 어떠한 변증법도 없다. 오늘날 새로운 문화적 규정들을 제국적 공간 속에서 사고할 때, 우리가 관심을 두는 유일한 문제는 상호교차의 순간, 사건의 규정, 그리고 다중의 카오스적 앙상블을 횡단하는 혁신 등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정치적 표현이 삶권력의 표현에 대해 언제 승리하는지를 인식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어떤 종합도, 어떤 지양(Aufhebung)도 없다. 여기에는 오로지 대립들, 각양각색의 표현들, 모든 방향에서 탈주하는 언어적 긴장들의 다양체들이 있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은 탈근대가 도입하는 측정불가능성에 의해, 즉 근대적 합리주의가 제안하고 부과한 모든 척도기준의 종말을 표시해주는 측정불가능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척도와 도구적 이성은 근대의 금의 시대(인본주의와 데카르트 사이)에는 그들 자체를 자생적으로 제시했고, 자신의 은의 시대(헤겔과 베르그송 사이)에는 질서지워진 세계의 형이상학적 종합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동의 시대에는 베버주의적인 도구적 이성과 케인즈주의적 계획의 폭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척도와 합리성은 종말에 이르렀다. 아도르노가 주장했듯이 시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귄터 안더스(Gunther Anders)가 주장했던 모든 희망이 히로시마 이후에 사멸했다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올바른 진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시와 희망은 탈근대적 다중들에 의해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척도는 더 이상 근대의 시나 근대의 희망과는 동질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탈근대의 새로운 문화적 표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것이 하나여야만 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이 새로운 변형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표현의 형상들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삶 안에서라는 것이다. 즉 척도 없는 형상들, 형식적인 측정불가능성. 바로 괴물들.


4. 따라서 탈근대적 혁신은 괴물스럽다. 이 괴물스러움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그것의 척도 없는 존재, 그리고 그것의 측정불가능한 존재론적-되기. 이 두 가지 특징을 세부적으로 사고하면서 괴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먼저 그것의 존재론적-되기를 살펴보자. 앞에서 제시했듯이, 새로운 문화의 생생한 표현들은 종합들로서가 아니라 사건들로, 그리고 무시간성으로 산출된다. 그것들은 측정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 혁신들 및 형식들을 구성하는 생(生, vital)의 요소들의 계보학 내부에서 그 형태를 취한다. 몇몇 동시대 철학자들은 탈근대의 이 새로운 표현적 힘을 추적하면서 그것을 특질화하려 했다. 라깡은 척도의 부재를 새로운 것과 예술, 그리고 기표 일반의 특징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데리다에게 있어, 주변부의 생산성은 자신을 산종(disseminating)6)하면서 질서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한다. 낭시와 아감벤은 이 극한의 들판에서 그럭저럭 수확(harvest)을 해낸다... 이 저자들 중 누구도 혁신의 괴물스러움을 긍정적으로 특질화하지 못했지만, 그들 저작에는 예리한 감각과 존재론적인 격화(exasperation)의 강도가 있다. 새로운 문화의 생생한 표현들이 비생산적이 되고 또 부재할수록, 새로운 형태들은 존재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더욱더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자신을 존재 속으로 침윤시키거나 빠뜨린다. 그것들은 자신의 바람에 쓸려다니는 모래들(shifting sands) 속에서 살고 호흡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이 저자들이 인지하는데 실패한 것은, 그들이 모험을 택했던 그 질료가 바로 새로운 세계들이 주조되는 진흙이라는 점이다. 존재론적인 차원은 자신의 한계를 무(無)의 가장자리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저 불가능한 주변부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구성능력에 무모하게, 어떤 대안도 없이 기생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은 언제나 기생적인 자본의 명령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조건 하에서, 즉 절망 아래에서 이동적이고 유연한 노동을 하는 비물질 노동자들의 다중적 지성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다. 존재론적 차원은 일련의 역설들로부터 출현한다. 노동의 여성화, 생산에서의 이성과 정동의 결합(conjunction).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황을 함축하는, 이 양가적이지만 근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끊임없이 규정하면서 나아갈 수 있겠다. 괴물은 존재론적 차원 안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혁신적 카오스의 이 존재론적 차원이 가진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척도의 부재에 있다. 괴물은 척도의 부재, 아니 어쩌면 새로운 척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이행 내부로부터 부정과 긍정을, 즉 탈주와 구성능력을 규정할 수 있을까? 17~18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흥미를 끌었던 기형물들을 발견했다. 왕들은 자신들의 공포의 방[런던에 있었던 흉악범의 밀랍인형 진열실]에 그 기형물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더 자세히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있어 측정불가능성은 척도에 대한 변명이었다. 숭고함과 마찬가지로 공포스러움은 질서에 대한 욕망을 정신 속에 복원시킨다. 얼마나 많은 머리 셋 달린 닭들이, 얼마나 많은 샴쌍둥이들 혹은 자웅동체 태아들이, 얼마나 많은 신체적 비틀림들과 기형아들이 해부학적 일탈들의 이색적인 저 박물관에 수집되었는가. 조르푸아 생틸레르(Geoffroy Saint-Hilaire)는 우리에게 태생적 별종들의 역사적 백과사전을 남겼다. 비록 그것은 다양한 시대의 괴물스러움들 및 자연적 결함들에 대한 법칙과 원인을 규명하려는 시도였지만 말이다. 심지어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형학(teratology)이었다. 괴물스러움의 새롭고 탈근대적인 형태가 기형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자신을 다르게 표현하는 삶일 뿐이다. 카오스 내부에 존재하는 특이한 기계들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구축하길 바라는 것은 바로 잡종성이다. 척도 형식들에 의해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거나 선형화(先形化)되지 않는 것은 바로 삶에 대한 희망이자 선택이다. 이전의 수많은 고대철학처럼(적어도 그것의 일부분은 전통이 되었다), 존재의 기원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 역시도 존재의 질서와 척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아르케(arche)는 최초의 원리이자 명령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우생학은 자신의 형식상의(stylistic) 원리들에 대한 합법화를 추구했던 근대에서 다시금 채택되었다. 괴물에게 손짓을 보내는 것은 고전적 우생학과 근대적 우생학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며, 원리 혹은 출발점으로서의 본질을 포기했던 하나의 존재론적 과정을 전개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새로운 여정은 우리를 우울한 지대로 이끌 것이며, 아마도 우리의 방향감각은 때때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투사로서 활동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 해답 없는 질문들과 함께 하는 여정에서이며, 질서지워지고 측정된 기원의 결여에서이다. 그것은 모든 원리(precept)를 뒤흔드는 하나의 긴장이다. 즉 공간적이든 시간적이든 모든 원리일 뿐 아니라 모든 선형화를, 그리고 모든 선형화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원적 매트릭스를 뒤흔드는 긴장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이 존재의 한 가운데에서 격동적인 창조성이 전위의 계보학들이 아니라 다양한 특이성들의 구체적 역사가, 인류학적 괴물스러움을... 부여잡는다. 숲이 다 타버린 땅은 비옥해진다. 그들은 숲(하지만 이것은 움직이고 있다)에 불을 놓았으며, 우리는 새로운 자연에서 살기 위해 (새처럼 자유롭게, 야생으로) 회귀하고 있다.


5. 전지구화의 차원들은 측정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어떤 경우에도 세계는 더 이상 어떤 “외부”(어떤 외부도 어떤 선행자도)를 갖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의 발전을 생각해보라. 그 중심에는 유럽인이 있었으며, 그것은 두 개의 외부를 갖고 있었다. 원시인과, 원주민 혹은 미개인, 즉 인류학적 선행자와 정치적 외부. 유럽인은 문명의 찌꺼기(rest)에 둘러싸인 중심점이었다. 시장과 다양한 감성적 모델들, 화폐와 거주지(the habitat), 세계(welt)와 주위세계(umwelt). 역사는 유럽인의 독점에 맞춰 조정되었다. 최초로 등장했던 자는 원시인이었고, 유럽인에 의해 지배된 자는 미개인이거나 원주민이었다. 그러나 지구화와 더불어 인간의 공간이 더 이상 다양한 한계들을 알지 못하고 하나의 한계(그것의 외부적 주변(circumference))만을 안다면, 그렇다면 이 한계에 도달하자마자 그 후에 나타나는 모든 표현은 내부로 향해질 뿐이다. 여기에는 자기반성이라는, 이 가장 거대하게 가능한 확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속성의 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후의 프로메테우스주의이자 부르주아 문명(culture)의 최후의 보편주의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해방된 인류의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최초의 규정으로 정의될 수도 있겠다. 지구화 이전의 모든 역사는 우리를 이러한 한계로 인도했다. 그것은 서구 문화의 지배 범위를 표시하길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모순들 및 투쟁들의 과정, 즉 억제될 수 없는 경향을 띄지만 바로 그 한계들 내부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주체의 계보학의 가장 거대하게 가능한(그리고 종종 괴물스러운) 효과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세계 무대(world scene)는 단순히 어떤 지평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무대미술이며, 소품들이 극의 일부가 되었다.(포스트-발레 뤼스) 세계 무대는 한계가 없으면서 동시에 유한하다. 그것은 이 괴물스러운 대립(confrontation)에 기생한다. 바로 이 역설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확실히 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은 미학적 중요성을 획득한다. 세계는 거대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작게 되었다. 즉 우리는 파스칼을 의미 있게 만드는 상황 속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이상 어떠한 신도 없다. 이 공간은 매끄럽고 표면적이다. 즉 가치의 내재성은 오로지 인간들의 노동에만 자신을 내맡긴다. 이 상황 속에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 그 괴물을 새로운 세계 무대 위에서 행동케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류학적인 변신의 과정 내부에서 행동하는 괴물을 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그 괴물을 돌연변이와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봤듯이, 이 돌연변이는 공간적이지만 또한 시간적이다. 서구 부르주아 문명이 세계의 가장자리에 도달하자마자 역사의 종말은 바로 시간 안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여기”와 “세계”의 공간적 종합은 “지금”과 “무한”의 시간적 종합을 흡수하고자 한다. 인류학적 변신은 이 역설적 앙상블들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탈근대가 의미하는 바이다. 즉 완전히 괴물스러운 거대서사이다... 사실상 인간사(human events)의 살(flesh)은 서사에 대해 요구되는 시공의 통일로 포위되지 않는다. 살은 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구적 사건들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모든 측면에서 예술적 표현을 흘러넘치게 한다. 엄청난 정념들이 살의 무능력을 통해 몸이 된다. 한때 즉 1968년에 앞서는 거대한 시대 동안, 이러한 무능력은 유토피아를 향한 어떤 열림으로서 살아남았었다. 문학적 그리고 미학적 전위들은 유토피아를 창출해야만 했다. 유토피아가, 실재를 구축하는 집단적 실천이라는 극단의 역량을 맴돌았던 한에서, 세계의 종말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목표, [즉] 걸작(masterpiece)은 마치 기독교 이전 시대의 위대한 작가들의 요한계시록이었다... 그러나 탈근대에서(여기, 우리 시대에서) 예언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예언자가 되지 않고도 요한계시록을 반성한다. 우리는 유토피아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전위에 대해 말한다. 세계는 완성되었다. 모든 시선은 내부로 향해진다. 탈주로는 막혀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내부로부터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은 우리 자신을 인도하는 탈주(exodus)를 함의한다. 한계에 도달할 때마다(그것은 그 너머가 없는, 즉 초과될 수 없는 한계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현재의 카이로스로 다시 향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 카이로스는 무엇인가? 그리스 문화에서 그것은 화살의 비행에 의해 표시되는 시간 속 순간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어떤 미래를 상상하는 문명이었고, 따라서 화살을 쏘는 것과 화살이 도착하는 것을 보는 것 간의 관계였다. 하늘로 쏘아진 화살은 별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카이로스는 우리의 심장을 꽂는 화살이며, 별의 극한으로부터 되돌아오는 화살이다. 카이로스는 우리 자신을 창조적 기획의 출발점으로 취하는 필연성(이자 가능성)이다. 그것은 우리 몸들을 변형시킬 가능성, 즉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몸들을 잡종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구축하고 내부로부터 잡종으로 만들 가능성이다. 그것은 삶의 모든 요소들을 시적 재구성으로 되돌림으로써 정치학에 참여할 가능성이다. 바로 “삶정치”라는 용어가 이러한 구성기획을 함의한다. 요컨대, 우리가 전지구화 아래에서 살아갈 때, 그리고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경계들이 있는 세계 속에서 살아갈 때,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자신과 프톨레마이오스를 확실하게 소진시키고 그래서 카이로스의 중심성이 유일한 준거점이 되었을 때, 이 모든 경우들에서, 예술적 실천의 창조적이고 구성적인 정신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에 있어 유일한 가능성이 존재 내부로부터 출발해, 모든 형성이 인간 몸의 바로 그 육체적․정신적 본질의 변형과 같은 삶정치적 실천을 관통하는 데 있을 바로 그때. 사회적인 것의 구조가 아주 중심적이 되었고, 그래서 세계가 아주 작고 제한적이 되어서 더 이상 이 거주지 뒤에 남아있을 어떠한 가능성도 없을 바로 그때. 유토피아적 환영들(다른 장소(topoi)에 대한 환영들)이 더 이상 자신을 제시하지 못할 바로 그때. 그렇다면 예술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새로운 존재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구적 공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그 공간으로 하여금 다시 특이성들의 실존을 향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죽음을 제거하도록, 지구기계의 내적 한계들을 해소하도록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괴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7. 다중은 죽음을 이 창조적 도전에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다. 다중은 특이성들의 앙상블이지만, 각 특이성은 또한 다중들의 앙상블이다. 이 기계는 삶을 위해 투쟁한다. 그것은 삶 내부에서 죽음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다중의 실천은 죽음에 대한 부정, 즉 삶의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에 대한 확실한 거부와 거절을 공통적으로 갖는, 생의 경험들의 지속적인 증식일 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구적 세계는, 마치 제국이 우리에게 정치적 질서로 나타나듯이 닫힌 세계인데, 그것은 시공간이 소모되었을 때 귀결로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에 종속된다. 그러나 이 닫힌 세계 내부에서 행동하는 다중은 각 주체를 통과해, 세계를 형성하는 각 특이성들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세계를 변형시키는 법을 배웠다. 푸코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역사가 우리가 서있는 세로축에서 자신을 갱신한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다중으로서의, 다중스러운 신체로서의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변형 내부에서만, 그리고 죽음에 대항하는 맹렬한 투쟁 속에서만 다중의 실천은 시작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보기에는 제국의 시대 그리고 다중들의 시간 동안에서의 예술의 의미이다.




1) [역자주] 보편적인 관광매춘의 원문은 ‘universal prostitution of tourism’으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성매매관광인 ‘매춘관광’과 의미상 구분짓기 위해 ‘관광매춘’이라는 말로 옮겼다. 네그리는 이것으로 오늘날 (대부분은 여행비자로 출국한) 노동자들의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한 유랑을 의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는 노동자들에게 특정 지역(제 3세계에는 제 1세계를, 제 1세계에는 제 3세계를)이 더 나은 일자리를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전지구 어느 지역에서도 자신의 신체를 팔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역자주] 루퍼드 머독은 세계 미디어 시장을 장악한 뉴스 코퍼레이션(The News Corporation Ltd.)의 대표로 런던타임스, 선, 선데이타임스 등의 신문과 폭스TV를 비롯해 스타TV, 내셔널 지오그라피 등의 방송을 소유하고 있으며, 21세기 폭스사, 하퍼콜린스 출판기업, LA다저스 등과 같이 영화, 출판, 스포츠 산업과 같은 시장에도 개입하고 있다.


3) [역자주] 바스키아는 80년대 초 미국에서 활동했던 20대의 젊은 흑인화가로, 엔디워홀의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검은 피카소라는 별명으로 유명세를 얻고, 28살의 나이에 생을 마친 이 천재적인 화가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공존하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참고할 만한 내용이 소개된 것으로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라. http://jmbasquiat.new21.org/main.htm

4) [역자주] 디스토피아로 옮긴 ‘dis-utopia’(본문에는 ‘dis-ustopia’로 표기되기도 했는데, 오타로 여겨진다.)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 유토피아(‘u(~이 없는)+topoi(장소)’)의 의미를 유물론적으로 역전시킨다는 점(즉 ‘어디에나 있음’)에서 주목되어야 할지 모른다. 최근에 번역 발간된 네그리의 작업노트는 그러한 의미역전의 사례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유물론적 목적어의 공통 언어는 디스토피아(dystopia)이다. 유토피아가 완전히 결정된 미래를 전유한다면 디스토피아의 공통 언어는 빈 상태로 남아있는 ‘장차 올 것’을 채운다. 디스토피아는 혁신의 힘을 진공 속으로 투사하기 때문에 힘차다. 디스토피아는 가난의 덕성(virtus)이다.” ꡔ혁명의 시간ꡕ, 정남영 역, 갈무리, 2004, 212쪽.

5) [역자주] ‘ensemble’을 영어든·독일어든·불어든 관례적으로 ‘총체’로 옮겨왔다. 예컨대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6의 다음 구절이 그렇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 ꡔ독일 이데올로기 Ⅰꡕ, 김대웅 역, 두레, 1989. 39쪽. 그러나 ‘총체(總體)’가 전체로의 통일 속에서의 차이의 지양을 함의하는 ‘totality’의 역어에 좀더 가깝다면, ‘총화(總和)’가 ‘조화’가 차이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ensemble’의 역어로 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낯선 번역어가 독서를 방해하는 어색함을 준다는 점에서 여기에선 의미만 환기시키고, 불가피하게 음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6) [역자주] “산종(散種)”은 “파종(insemination)”과는 달리 씨앗을 무의미하게 흩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에게 있어 ‘산종’은 자신의 ‘원본 텍스트’로 되돌아갈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이 출발했던 텍스트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의미의 방사(emission)과정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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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번역 근대적 성찰의 비판적 작업
문화관련 글들(ktp) | 2008/03/08 00:02

                    문화번역: 근대적 성찰의 비판적 작업

1. 문제 제기


       근대의 역사는 ‘경계’를 통해 삶의 질서와 의미 체계들을 구성해왔다. 서구/비서구, 동양/서양, 여성/남성,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백인/유색인 등의 이항 대립적 위계 질서를 기반으로 구성된 범주들은 타자와의 ‘차이’와 ‘차별’을 통해서 근대적인 자아 정체성의 기반을 마련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의 역사는 ‘타자’의 차용 appropriation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수반한다(Kuhiwczak 1995:118). 근대적인 역사적 과정상에서 확고하게 구획되어져왔던 모든 경계들이 그 견고성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 문화 연구의 한 방법론으로서 문화번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화 연구에 있어 ‘번역’과 ‘횡단’에 대한 관심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탈식민주의 비평과 비판 인류학에 의해 고무된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의 조건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 공간, 국가적 경계들을 넘나드는 초국적 흐름들이 활발해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이질적인 상징 체계들간의 ‘교섭’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고, 또한 근대적 주체를 구성해왔던 많은 지식과 전제들이 ‘재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독립 학문 분야로 등장하기 시작한 번역학에서의 ‘문화적 전환’이라 불리는 흐름들도 문화 번역이 문화 연구의 주요한 연구 분야가 되는데 기여하고 있다.

       문화적 접경지대가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는 현재의 글로벌 사회에서 문화 번역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이질적인 것들이 교류하고 교차되는 문화적 접경지대는 견고한 경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던 사람들에게 접경지대 히스테리(borderlands hysteria)를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고 말하여지지 못했던 의미들이 새롭게 드러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평가된다.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와 번역을 통한 ‘변형’의 공간으로 문화적 접경지대는 ‘문화 번역’의 정치적인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으며, 번역자의 행위성과 번역의 효과 등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 번역을 새로운 문화 연구의 현장으로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번역’이라는 의미에 부착되어왔던 많은 전제들을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본 논문은 문화 번역이 근대를 성찰하는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루고자한다.

       ‘문화번역’은 번역이 이루어지는 특정 시공간적 맥락과 문화 번역의 행위자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는 총체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문화 번역을 역사적으로 추동해 왔던 힘들은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것은 ‘문화’의 개념과 방법론을 정의해왔던 근대적 지식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론적 연구 주제로서 문화 번역의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타자와의 대화적 관계(dialogical relations)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번역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문화번역’을 둘러싸고 행해져왔던 다양한 권력 메커니즘을 짚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


2. 문화의 개념과 문화 번역


       전통적으로 문화를 다루어왔던 문화 인류학은 시간과 문화적 차이로 구획된 경계를 횡단하여 상호간의 이해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번역의 예술’임을 주장해왔다. 인류학자가 생산하는 민족지(ethnography)는 바로 이러한 번역의 결과물로 이해되어왔다. 고전적인 문화 인류학에서 원전에 해당하는 타문화를 다루는 문화 번역자로서의 서구 인류학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상상되었다.


       옛날 옛적에 <고독한 민족지학자>는 <그의 원주민>을 찾아 석양속으로 말을 타고 떠났다. 그는 많은 시련을 겪고 아주 먼 나라에서 원하던 대상을 만났다. 그곳에서 <현지조사>라는 궁극적인 시련을 감내하면서 통과의례를 치러냈다. <자료>를 수집한 뒤에 <고독한 민족지학자>는 본국으로 돌아와서 <그 문화>에 대한 <참된> 설명을 써냈다(로잘도 2000:70).1)


       고독한 민족지학자를 번역자로, 그의 원주민을 번역의 원전으로, 현지조사를 이중언어 사전을 뒤적이며 원전의 언어에 상응하는 번역의 언어를 찾아 고심하는 과정으로, <그 문화>에 대한 <참된> 설명을 ‘번역된 텍스트’로 대치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화 번역자로서의 인류학자의 이미지를 지배해왔던 이러한 수사학은 인류학이, 특히 서구의 인류학이 타자의 ‘문화’를 어떻게 정의해왔는가를 보여준다. 타문화는 ‘저기 바깥'에 놓여있는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그 문화는 시간과 역사적 맥락에 구애받지 않는 정지된 상태로 보여졌다. 문화에 대한 고전적인 인류학적 사고는 타자의 문화를 기술할 때 ‘현재 시제’를 사용했는데, 이는 타자의 문화에서 행위자의 관점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인류학자는 그 집단의 문화적 존재에 대한 지적 독점권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흔히 ‘민족지적 현재’(ethnographic present)라고 불리는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당시 인류학에서 다루던 ‘문화’의 중심 개념인 구조, 관례, 규범 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서, 한 집단의 구성원이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는 가정하에, 타자의 삶 자체를 ‘표준화’해서 기술하는 글쓰기 방식이었다(로잘도, 위의 책, 89).2) 특정 문화권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들은 결국 그 문화의 본질에 대한 일반화를 도출하기 위해서만 사용될 뿐이었다. 모든 문화적인 세부 사항들은 ‘마치 프로그램화된 문화적 절차인양 묘사’되며, 관찰자로서의 문화인류학자는 이것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중재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켜왔다. 이렇게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여야 진정한 객관적 사실에 도달한다는 근대적 지식 체계에서의 신념은 번역의 행위에 관여하는 ‘권력’을 간과해왔다. 어떤 문화적 번역자도 자신의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두 문화간의 ‘거래의 조건들’에 관여하는 권력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우선 이러한 고전적인 방식의 문화 번역의 작업은 ‘문화 횡단’의 필수적인 요건인 문화들의 동시대성을 거부했다는 점이다(Fabian 1983). 문화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란 잘 짜여진 망이라기보다는 이성, 감정과 충동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경험되고 실천되며, 변화되는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규율화된 질문들에 의해서는 타자의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이론이 생산되어질 수 없었고, 타자들은 늘 항상 시간이 정지된 상태로 ‘분석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위치지어졌다. 이렇게 타자, 주로 비서구의 문화를 불변하는 실체로 보는 ‘몰시간성의 환상’이라는 인류학적 수사학은 결국 ‘타자의 발견’을 주도해왔던 식민지 시대의 권력의 집행을 위해 필수적인 ‘시공간적 거리두기’(allochronic distancing)의 인식론으로 이어진다(Fabian 1983). ‘시공간적 거리두기’는 타자를 자아와는 다른 시간, 공간적 지점에 위치시킴으로써, 둘간의 메울 수 없는 ‘문명적 격차’를 상정하는 것이다. 타자에게 동시대성을 거부하는 이러한 인식론은 제국주의적 법질서, 종교, 생활 양식 등이 ‘계몽’과 ‘문명화’ 사업이란 이름 하에 피식민지인들에게 이식돼야 한다는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 그들이 사용한 문화적 힘의 근거는 근대-전통, 문명-야만, 진보-정체 등의 이분법적 도식 하에 타자에 대한 백인의 의무(White man's burden)를 강조하는 것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제국주의적 권력이 집행될 수 있는 ‘문화적 근거’를 제공해왔다. 동시에 타자들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구가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고 있는 동경과 향수의 대상으로 미화되어졌고, 옛 조상들의 원시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박물관의 전시물로 인식되어졌다(Corbey 1995).  자신들을 ‘문명화된’ 관찰자의 입장으로 위치시킨 문화번역자들은 타자의 문화를 지나치게 이국적인 것으로 독해하는 경향을 보였다(Palsson 1993). 이러한 경향들은 현재에도 문화 번역의 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으며, 시간성이 배제된 타자는 동일한 공간과 동일한 시점에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주체로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타자의 문화적 차이가 강조되는 것이 타자가 아직 합리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개념화되거나 보편적인 이성에 도달하지 못한 개념으로 이해될 때 ‘문화’란 타자의 타자성을 드러내는 기표로서 작동된다.

       문화 진화론적 시각을 비판하고 등장한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 역시 중심의 관점에서 모든 타자의 문화적 차이의 평등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여전히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서 진행되온 문화 번역의 과정을 잘 다루지 못하고 있다. 각각의 문화들이 분리되어 있고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은 각 문화가 구성되어 왔던 과정에서의 상호 주고받았던 영향이나 결절(articulation)을 놓치기 쉽게 만든다. 과도한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은 이런 점에서 식민제국이 행사한 권력을 통해 ‘변형’돼온 타자의 동시적인 존재에 대해 간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총체라는 단위에 주목함으로써 문화 단위간에 이루어지는 무수한 교차점이나 접경지대를 소홀히 다루었다. 

       로잘도는 “고독한 민족지학자가 그의 후계자들에게 물려준 성스러운 꾸러미 속에는 제국주의와의 공모, 객관주의에 대한 헌신, 기념비주의에 대한 신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72)고 적고 있다. 문화 번역자는 이러한 유산들의 수혜자로서 의심할 수 없는 신뢰의 위치로 자신을 설정했다. 문화번역자는 변화하는 문화적 현실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쓰는 수사적 관행에 의해 권위적인 객관성을 확보해왔다. 특히 “이론들은 부침이 있지만 훌륭한 민족지 혹은 번역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성취로 남아있다”는 기념비주의에 대한 신념은 자신을 최고의 번역자로 자부하는 경쟁과 각축의 장으로 몰아넣었고, 가장 ‘현지인의 관점에 충실하다거나,’ ‘타자의 문화적 정수를 밝혀냈다’라는 주장들이 문화 번역자로서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이러한 기념비주의에 대한 신념은 또한 오랜 동안 텍스트 번역을 지배해왔다. ‘번역은 투명함의 시학(the poetics of transparance)에 근거하여 가장 상응하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Godard 1990:91)이라는 주장은 번역자를 중립적이고 초월적인 매개자로 상정해왔다.

       이러한 주류의 이론들은 최근 두 방향에서 도전받고 있다. 하나는 번역의 투명성에 대한 강조가 원전 텍스트의 문화적 흔적들을 없애버리고 번역자의 자성성을 배제한다는 점이다.3) 또한 번역이 특정한 맥락에서 일어하는 사건이나 행위라는 점이 간과되면서, 번역자가 원전을 ‘읽고’ 그것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수행성’이 지워진다는 점이다.4) 번역의 행위는 암호를 푸는 해석적 행위(decoding)와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내는(re-encoding)을 포함하는 개념이지, 코드와 코드를 횡단하거나 초월하는 행위transcoding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초월적인 관찰자가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분석하는 것이 더 이상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식은 단일한 분석 방식으로부터 복수의 분석방식으로 옮겨가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시학, 서사분석, story-telling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적 텍스트(원전)와 문화적 텍스트(번역된 텍스트)간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대한 강조는 두 개의 다른 상징과 의미 체제와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번역자가 두 가지 상징 체제를 조정, 조작하는 측면이 바로 문화 번역의 정치학이 개입되는 부분이다. 문화 번역의 정치학은 번역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 질서로의 편입을 용이하게 하거나, 번역된 텍스트의 대상 집단의 ‘읽는 효과’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만들어 내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근대적 경계들의 교차와 다중적 언어와 의미들의 절합을 통해 드러나는 ‘권력’을 분석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3. 문화 번역자: positioned subject


       문화 번역자가 적극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하는 자로 정의된다는 점은 우리에게 번역의 행위와 관련된 정치학에 관심을 갖게 한다. 문화 번역자의 관점은 관찰 자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지식과 권력은 서로 연계된다(로잘도, 2000). 그러므로 문화 번역자는 특정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도록 ‘위치지워지는 주체’(positioned subject)로 설정된다. 문화 번역자는 자신의 연령, 성별, 성적 지향성, 계급, 인종, 정치적 성향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어떤 문화적 현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다른 것에는 완벽하게 무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번역자는 ‘초월적인 관찰자,’ ‘엄밀한 언어학자’가 아닌 그 자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문화화된 행위자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텍스트의 다의성과 해석의 다의성을 인정하는 것은 원전을 훼손한다기보다 번역자의 지위를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의미이다.

       현지 조사는 인류학자들에게 있어 다른 문화와 교섭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는 일련의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해석’의 과정을 수반한다. 텍스트의 번역자도 텍스트를 구성하는 다양하고 중층적인 의미 체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번역자의 관심이나 지식 정도에 따라 번역되는 의미들은 많은 차이를 갖게 되고 모든 번역은 이런 의미에서 부분적이고 편파적일 뿐 아니라, 의도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근거로 ‘문화’을 이해할 때, 문화 번역자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문화인류학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개인은 초월적인 자아를 구성할 수 없다는 바로 그점 때문에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 번역자의 위치에 있다. a문화 번역자는 문화의 교차로에서 문화의 흐름을 매개하는 행위자이다. 그러므로 문화 번역자의 자아는 다중적인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며, 문화와 권력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즉 그들의 번역 행위는 “인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이고, 윤리적인 것”의 속성을 담고 있다. 최근의 탈식민적 문화 비평과 페미니즘은 ‘문화 횡단’과 ‘문화 번역’에 대한 분석의 지점들을 발전시켜왔다. 식민지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진행되는 번역과정은 두 이질적인 문화간의 기호와 언어 상의 ‘등가성’을 만들어내는 제국주의적 이중언어 대역 사전의 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힘이 있는 쪽에 의한 일반적인 언어의 변형 과정이라기보다는 양가성이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크라니어스커스 2001). 다음에서는 번역 과정에 개입되는 차용, 모방, 다중성에 대한 의미를 살펴본다.

       

1) 번역과 차용


       셍굽타Sengupta(1995)는 비서구인으로 최초로 노벨상을 탄 인도 시인 타고르Tagore가 벵갈리어로 쓰여진 원전을 어떻게 에드워드식 영어로 전치하면서 원전의 톤, 이미지와 어휘들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타고르 자신이 번역한 그의 시는 식민주의자가 동양의 타자를 바라보던 전형성에 스스로를 부합시키고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번역에 있어 타겟 대상이 갖고 있는 문화적 가치와 힘이 얼마나 번역자의 태도를 형성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벵갈리 사회의 아방가르드 시인이었던 타고르를 동양의 성인이며 위대한 예언자로 변형시켰던 ‘번역된 텍스트’로서의 그의 시는 타고르 자신이 문화 번역자로서 갖고 있던 정치학을 잘 보여준다. 서구가 동양에서 바라보았던 신비주의에 대한 갈구와 타고르 자신이 서구 세계에 대해 ‘유혹적인’ 동양으로 보여지고 싶은 욕망은 타고르를 서구의 기독교적 교화를 동양의 신비주의적 방식으로 실현하는 현자로 위치지게 했다5). 이러한 상호적인 차용은 식민지 시대에 정치적 효과를 발휘했을 뿐 아니라, 후에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서 타고르가 아시아인의 자부심을 세워준 인물로 상징화되면서  self-orientalism의 전형이 만들어지는 것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타고르의 시에 대한 서구의 열망은 바로 자기 자신이 파괴했던 것을 갈망하는 ‘제국주의적 향수’로 이해될 수도 있다.  또한 타고르는 영국의 식민 권력의 문명화 사업에 의해 생산된 ‘검은 원숭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검은 원숭이6)는 식민 권력의 불안을 가중시켰던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의 지식인들을 상징하며,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자를 ‘모방’함으로써, 영국인과 흡사하거나 우수한 능력을 보였고, 급기야 백인 지배자와 대등한 위상과 권리을 요구하기도 했다(이옥순 52). 문화 번역자로서 이들은 이질적인 문화의 ‘차용’을 넘어 ‘혼종’을 상징하며 식민 지배자의 정체성을 위협했다. 이런 의미에서 바바에 의해 개진된 식민 담론의 ‘미끄러짐’의 의미는 문화 번역에서 상정되는 의미의 등가성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탈식민주의 문화 전략을 상정한다.

       원형의 반복이 결코 원형과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번역 과정은 항상 ‘원형’을 불안정하게 하는 ‘결여’를 배태한다. … 식민담론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또한 그 불완전함을 증폭한다.” 이러한 식민 담론의 ‘미끄러짐’은 제국의 중심부에서 생산된 특정한 생각, 서사, 이론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바트 무어-길버        트,2001:281).


       바바의 탈식민 전략은 “식민지 지식을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권력 의지”(위의 책, 275)로 파악하기보다는 피식민 주체가 경험하는 ‘분열된 시간성’을 통해 근대성의 기획에서 드러나지 못했던 사회적 모순, 정치적 정체성, 혼종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발화 양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바트 무어-길버트, 2001:292). 강내희(2001)는 신식민지 지식인들의 주체를 구성하는 흉내내기, 잡종적 성격 또한 서구에 합류하는 가능성과 패러디를 통해 비판하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문화 횡단이라는 번역 작업을 하다보면 식민권력이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지 못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식민권력의 ‘이접’을 통해 일방적으로 피식민지의 문화가 변용되거나 종속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크라니어스커스 2001:317). 스페인의 정복을 당한 타갈로그인들의 기독교로의 개종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Rafael(1988)은 스페인의 선교사들은 신의 구원의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 그 지역의 고유한 토착 언어를 다시 부활시켜야 했으며, 피식민지인들은 두 상징 체계간의 번역 불가능성 때문에 설교를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낚시를 하듯(fishing) 순간 순간 단어를 건져냈으며, 해석 과정에서도 자유로왔다. 이런 상황은 결국 식민 제국의 언어적, 정치적 권력을 불안하게 했다. 이 상황에서 문화횡단은 “종속적 주변적 집단이 지배적 또는 메트로폴리스 문화에 의해 그들에게 전해진 재료들을 선별해서 그로부터 뭔가 창안해내는 접촉지역의 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매리 루이스 프랫, 크라니어스커스, p318에서 재인용).  

       또한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 번역의 작업들은 ‘차용’과 ‘다의성’에 대한 글로벌 상황에서의 예들을 제공하고 있다. 왕 샤오밍은(2001)은 중국에서 1980년대 서구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서적들이 대규모로 번역되고 있는 현상을 ‘번역황금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번역 활동을 조직해 낸 번역 그룹들은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리고, 전문적인 번역자 출신이 아니다. 중국의 전시대 30년을 주도해 온 번역이 “주로 공식적인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고 공식적인 공산당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되었다면”(336) 새롭게 부상한 신진 번역가 그룹인 ‘청년지식분자족’은 ‘번역’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고 이러한 ‘서구’의 번역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해내고 있다.7) 중국의 오랜 역사 안에서 또 하나의 진정한 ‘재생’을 시작한 역사적 교차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의 번역 사업은, 왕에 의하면, 중국 사회를 ‘사회 사상 변혁의 전장’으로 변형시키는 정치학을 만들어낸다. Stefansson(1993)은 일본의 ‘코믹 만화’들이 중세 유럽과 바이킹의 문화적 이미지들을 그 문화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차용하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상품화 전략에 동원되는 문화 번역의 예를 들고 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문화 차용에서 성공적인 번역이란 원전을 그대로 원전의 의미대로 보전하는 것이 아니다. 코믹 만화의 독자들을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일본적인 요소들을 바이킹의 세계에 부과하는 착종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2) 여성 번역자: 에스페란자 정체성의 출현


       문화 번역은 인간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문화적 힘으로 작동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상징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힘의 가장 주요한 원천이 되어왔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상징은 식민과 피식민, 전통과 현대, 민족과 민족, 인종들간의 대립, 집단간, 국가간의 교차가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이러한 문화 횡단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동원되는 문화적 힘으로 작동되어왔다. 치카노 문학과 역사적 서사는 ‘번역’의 과정에 작동되는 이러한 힘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멕시코 영웅 서사의 전형은 전적으로 남성 영웅 서사로 그려져왔다. 이때 ‘차이’로 구별되는 여성의 위치는 모호하게 남게 된다. 백인들의 제국주의적 권력에 맞서는 멕시코 남성들은, 실질적인 힘이 부족한 상태에서, 신화적인 힘을 통해서만 저항적인 주체로 설 수 있었고, 이를 위해 남성 영웅 서사는 원초적 가부장제를 복원시킴으로써 저항적 힘을 만들어나간다. Behar(1993)는 멕시코 남성들의 역사적 상상력 속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여성의 이미지의 하나로 ‘La Malinche’를 들고 있다. 스페인의 정복자 Cortes와 멕시코 남성 영웅 사이의 정치적인 적대감은 사실 코르테스의 연인이며 통역자였던 La Malinche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문화 사이에서 지배를 매개하고 성적인 교환을 만들어내는 여성으로서의 La Malinche는 그후 ‘번역자’와 ‘반역자’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역사적 상징으로 남게 된다. La Malinche로 상징되는 여성은 외부 세력의 영향에 쉽게 동화되고 오염되기 쉬운 존재로 이미지화되는 가부장적 상상력의 기초를 제공해왔다. 결국 통합된 주체로서 자신을 설정해왔던 멕시코 남성 영웅의 서사들은 문화적 경계에 선 여성과 그들의 성적 오염을 연결시키면서 멕시코 역사를 남성 영웅사로 ‘번역’해왔으며, 여성성, 섹슈얼리티, 번역과 반역 사이의 의미 있는 상징 체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적 남성 서사는 페쇄적이고 닫힌 가부장제를 조롱하는 치카노 문학들의 등장으로 사라져가고 있고, 새로운 치카노 정체성인 에스페란자의 출현으로 탈중심화되고 있다. 에스페란자(Esperanza) 또는 메스티자Mestiza는 여러 문화와 언어가 교차하는 접경지대에 위치하는 여성들이다. 이는 멕시칸계통의 사람들이 이민과 이주를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 안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다중적 주체들이다. 이는 실질적인 이주에 의해 새로운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여성 주체뿐만 아니라, 전통적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적 가부장제 등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매개하거나 저항하는 상징적인 여성 주체를 상정하기도 한다. 상징적인 욕망과 위협의 세계는 그녀 내부에서 다중의 주체가 교차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그들이 문화적 경계(borderlands)에서 하고 있는 문화 번역의 글쓰기들은 최근 여성주의 이론과 탈식민지 이론의 발전에 자극을 주고 있다. 실제 로잘도에 의하면 에스페란자 정체성은 치카노 사회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해방적 상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문화들을 매개하고 문화들이 부여하는 무게와 의미들을 내부에서 해석하고 통합하는 다중적 주체로서의 에스페란자들의 등장(로잘도, 2000: 236-237)은 여성 문화 번역자를 ‘반역자’의 지위로부터 ‘근대적 억압의 해방자’로의 지위로 격상시켜내고 있다. 그들은 대안적인 문화 공간을 제시하고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세계를 체험하고 이와 타협하는 새로운 주체들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중적 주체는 문화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위치없는 주체가 아니라, 주변화된 타자의 특수하고도 복잡한 역사적 정체성을 지시한다(Anzaldua 1987).  에스페란자가 ‘욕망과 위협의 세계’, ‘싹터 오르는 섹슈얼리티와 위험한 남성적 폭력의 세계’, ‘물질의 유혹과 착취되는 몸의 글로벌 자본주의하’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을 대표한다면, 이미 많은 여성들의 현실적인 삶의 조건이 다중적인 경계의 기반위에서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주의 담론에서 번역은 이런 의미에서 재생산이 아닌 새로운 생산으로 이해되고 있다(Godard 1995; Simon 1996). 단일한 의미와 진리를 만들어낸다는 모든 가정들은 유보되어지고, 번역은 수행성을 통한 변형으로 이해되고, 다중적 여성 주체들의 발화는 근대성의 경계들을 해체시키는 문화 비판으로 인식되고 있다.


4. 맺음말


       번역의 작업은, 그것이 체험되는 타자의 문화이든 문학작품 등의 텍스트나 영화 등의 비주얼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던 중립적이거나 순수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문화번역은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오역, 농담을 이해 못한 것, 언어의 이중적 의미를 간파하지 못한 것 등이 문화 번역에서 흔히 일어나지만 이는 어떤 경우, 단순한 의사 소통 상의 혼돈이라기보다는 체계적으로 형성돼온 오해일 수 있다. ‘문화’는 시대마다 상황마다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왔고, 그 정의의 모호함과 중층성은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성을 갖고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적인 자본의 흐름을 매개하는 문화 번역의 경우는 Hannerz(1993)가 지적한 ‘문화충격방지산업8)’으로 귀착되기도 한다. 탈식민지 지형에서 이루어지는 문화 번역은 로잘도가 지적했듯이 다양한 이질성과 정체성간의 ‘상관된 지식’을 구성하는 행위이다.9) 상관된 지식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유동하는 공간과 교차하는 다양한 경계들에 대한 열린 눈을 필요로 하고, 급격한 문화적 동요와 이질성이 돌출되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문화 번역자의 정치적 감각이 요구된다.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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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1999),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서울: 푸른역사.

바트 무어-길버트, 이경원 옮김(2001),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서울: 한길사.

레나토 로살도, 권숙인 옮김(2000), 문화와 진리, 대우학술총서 483, 서울: 아카넷.

왕 샤오밍(2001), “번역의 정치학-1980년대 중국 대력의 번역 운동,” 흔적 1:333-362.

존 크라니어스커스(2001), “번역과 문화횡단 작업,” 흔적 1:315-332.

Anzaldua(1987), Borderlands: La Frontera, San Francisco: spinsters/aunt lute.

Behar, Ruth(1993), Translated Woman, Boston: Beacon Press.

Co, Raymond(1995), “Ethnnographic Showcases, ****-****," In Jan Nederveen Pieterse        and Bhikhu Parekh, eds. The Decolonization of Imagination,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Fabian, Johannes(1983), Time and the Oth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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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sson, Gisli(1993), ed., Beyond Boundaries: Understanding, Translation and            Anthropological Discourse, Oxford/ Providence: Berg.

Rafael, Vicente L(1988), Contracting Colonialism: Translation and Christian Conversion        in Tagalog Society under Early Spanish Rule,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Sengupta, Mahasweta(1995), Translation, Colonialism and Poetics: Rabindranath Tagore        in Two Worlds," In Susan Bassnett and Andre Lefevere, eds., Translation,        History & Culture, London: Cassell.

Simon, Sherry(1996), Gender in Translation, London: Routledge.

Stefansson, Halldor(1993), Foreign myths and sagas in Japan: the academics and the        cartoonists," In Palsson, Gisli, ed., Beyond Boundaries: Understanding,          Translation and Anthropological Discourse, Oxford/ Providence: Berg.



1) 이러한 이미지는 인류학이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 설립된 19세기부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서구의 중세부터 존재해 온 ‘Homo viator’의 이미지는 타자와 접촉하는 서구인들이 타자의 문화를 차용해온 방식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Homo viator는 먼 곳으로 순례를 떠나 이상스럽고 특이한 이야기, 에로틱한 모험담, 위험했던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가득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서구의 여행자를 의미했다 (Gisli Palsson 1993:6).

2) 로잘도가 인류학의 고전시대(****-****)라고 불렀던 시기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표준하하는 기술이 객관성을 독점하고 있었던 때’로 요약된다(98)

3) 1980년대 인류학 안에서는 ‘텍스트로서의 민족지’를 표방하는 연구물들이 나왔고, 실험적 글쓰기를 통해 인류학 내부에서 제기된 윤리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했다. 탈식민주의나 페미니즘에 영향으로 문화 자체가 역사적, 정치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문화 자체가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 문화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논의함으로써, 문화를 맥락에서 벗어난 추상적인 실체로 다루는 것등에 대한 인류학 내부의 자성적인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4) 이런 의미에서 Godard는 번역자는 기계적으로 언어를 옮기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원전에 대해 ‘종’의 위치로 개념화된다고 주장하고 있다(91). 20세기를 지배했던 번역에 대한 이론은 번역은 복사(a copy) 이며 창조적인 발화(utterance)가 아니다라는 신념을 강화시켜왔다.

5) Sengupta 는 타고르의 시에 대한 서구의 열정은 당시 서구의 시대적 맥락에서 오는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감정에 기인했다고 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타고르의 시는 후에 서구의 문학자들에 의해 곧 잊혀져갔는데, 1차 세계 대전 이후 시에 대한 서구의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급격하게 변화된 사실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6) 검은 원숭이는 키플링이 붙인 경멸적인 용어로 끊임없는 모방을 통해 식민 권력자를 닮아가는 인도의 지식인들을 의미했다.

7) “그들은 현대 중국의 인민들이 그들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으며 그 과정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기인하여, 첫 단계는 현대 서구사상을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들 철학 사상을 심도있게 비평하는 것이며, 이 단계를 거친 연후에야 비로서 세 번째 단계인 다른 민족들에 뒤지지 않을 사상과 철학적 담론의 체계를 중국학자 자신이 정립하는 것이다 (338-339)

8) 문화충격방지산업culture shock prevention industry 이란 문화간 이해를 증진한다는 목적하에 다국적 기업의 사원들을 포함하여 국제적인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단순한 지식과 추상적인 인류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일종의 문화 교육으로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사업이다.

9) “예전에는 차이에 대한 연구가, 비가시적인 채로 남아있는 <자아>와 대조하여 정의되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사회적으로 명확한 정체성 사이에서 드러나는 유사성과 차이 간의 놀이가 된다.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들>과 <우리> 양자 모두가 <문화의 해석>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끌고 당기는 상관적 이해의 형식을 띠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국 문화 번역은 ‘상관된 지식 relational knowledge'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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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생명, 그 뿌리는 정신이다
문화관련 글들(ktp) | 2008/02/29 08:39

문화는 생명, 그 뿌리는 정신이다.


권병길(연극배우, 영화배우)

<공공의 적> 등 다수 영화 출연


우리의 긴 역사는 강대국들의 수없는 침략과 식민지 하에서도 문화를 잃지 않고 살아 온 역사이다. 문화는 곧 생명, 그 뿌리는 정신, 곧 우리의 정체성이다. 어느 민족 국가에도 문화만 지켜지면 강대국의 식민지하에서 다시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사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세계화 아래 새로운 자본의 침략이 소리 없이 한반도를 덮고 있다. 그 자본의 힘은 지켜야 할 우리의 가치를 흡수하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의 식민지화에 경각심을 갖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도사리고 있는 독소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숭례문, 조선왕조 초기에 건축된 600여년의 자존심, 그 생명이 불에 홀딱 타 버렸다. 불을 지른 사람은 이 사회가 만든 인격체이며, 억울하다 분풀이를 무책임 무관리의 틈을 타 숭례문을 선택한 비열한 사람이다. “다시 복원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 바로 그 말은 어쩌면 이 사회의 자화상 아닌가? 문화재 생명은 끝난 것 같다. 아무리 돈을 발라 첨단 재목과 공법을 쓴다 해도 조상의 땀과 얼, 지나온 역사는 재로 변했음을 똑똑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기초가 안 된 사회, 막 내린 정부에서 생긴 일이니 막 오른 정부는 다행이라고 미소 짓는 사람들...... 이 책임은 분명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구청, 문화재청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반(反)문화의 소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청계천 복원도 좋고, 운하도 좋고, 새만금 막아도 좋고, 골프장 넓히는 것도 좋다고 하면서, 아파트 건축을 올리고 또 올리는 반문화 의식. 그러나 서민과 농민들 허리가 휘는 것은 끝없이 계속되어 왔다. 자동차 시대에 농촌을 뒤엎고 산을 뚫어 길을 낸 도로를 달려가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은 무수히 파괴되고 천박한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여기저기에 꿈틀대고, 먹고 마시고 놀고 잠자면서 돈만 있으면 나라님 행세할 수 있는 것은 졸부 문화의 현주소다. 이뿐인가? 문화의 전당이란 이름 붙인 문예회관은 지방자치의 숙원 사업으! 로 타 지역보다 더 크게 경쟁하듯 수백억을 들여 전시용 건축을 하고 내용도 없이 농촌의 삶과 부조화를 이루니, 괴물 같기까지 하다.


이러한 문화 의식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35년의 식민지하에서 지금까지 우리의 주인의식이 말살되고 문화 정체성이 목 조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 문화의 위기를 알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영화를 필두로 방송·서비스 분야, 예술·문학 저작권 등이 위기를 맞고 있고 미국의 짝퉁 문화에 끼어 변질된 모습이 되고 있다. 한미FTA 이전에도 미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불가능한 관계가 없었다. 한미 군사 협력, 무역, 교류, 여행, 이민, 유학 등 어느 하나 빠짐없는 수교국인데 한미FTA를 해야 더 잘 살 수 있다는 논리이다.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잘사는 것이냐? 경제적 이득만 있으면 우리의 정체성은 잃어도 되는 것인가?


이미 지난 해, 스크린쿼터, 소고기, 자동차, 의약품은 한미FTA 선결 조건으로 양보하여 본격적인 쌍무 협정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 영화 의무상영일 수를 145일에서 73일로 축소, 헐리우드 영화의 영역을 넓혔다. 우리 영화계는 적자 속에 허덕이고 있다. 1/4분기 우리 영화 점유율은 61.6%에서 48.9% 하락한 반면, 미국 영화는 26.4% 상승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 영화계에서는 제작여건 위축, 투자회피, 제작편수 축소, 영화의 질적 저하, 인력 실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왜 미국은 스크린쿼터 축소를 주요 의제로 강제했던가? 그것은 전 세계의 80% 이상을 미국 영화가 장악하고 있고, 그 영화 산업은 미국 주요 산업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것은 점점 없어지고 미국 문화로 대체해도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얘기를 보고 듣기를 원한! 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 정서, 혼으로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안고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남북화해 정책의 중심에 한미FTA 타결을 두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취임한 이명박 정부가 우리 전통과 문화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 자유무역협정 찬성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문화는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치적 힘을 인간회복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하며,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안내자인 것이다. 그 증거로 평양에서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연주가 전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진행된 것을 들 수 있다. 긴장되고 있는 북미관계에 새로운 햇빛이 비쳐지리라 기대해 본다.


이제 한미FTA 비준 통과 절차는 국회로 넘어 갔다. 미국 역시 의회 인준을 남겨 놓고 있다. 우리 국회는 FTA 협정을 처리하기 전에 지금까지 열거한 각 민족과 국가의 문화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유네스코의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 협약은 경제적 잣대로 보는 강대국의 패권에 맞서 민족과 자국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만든 국제 협약이다. 문화를 지키기 위해 이 협약에는 이미 70여 개국이 그 뜻에 찬성, 가입했으며, 우리 정부 역시 그 협약의 중요성을 알고 찬성, 가입했다. 이 협약에 반대하는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 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미국이 자본의 독점을 통해 문화를 독점하겠다는 야만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리 국회 역시 유네스코의 문화 다양성 협약의 국회 비준을 미루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국회 이전에 FTA를 주도한 외교통상부가 국회에 이 협약에 대한 비준 동의 요청을 하지 않은 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미 FTA 시작이 스크린쿼터 축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미국에 조공으로 바친 스크린쿼터 축소의 문제점을 은폐하고 미국 영화 산업에 일조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우리의 창작 권리를 근본부터 흔드는 FTA 협정은, 반민족, 반민주, 반문화의 협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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