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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번역 근대적 성찰의 비판적 작업
문화관련 글들(ktp) | 2008/03/08 00:02

                    문화번역: 근대적 성찰의 비판적 작업

1. 문제 제기


       근대의 역사는 ‘경계’를 통해 삶의 질서와 의미 체계들을 구성해왔다. 서구/비서구, 동양/서양, 여성/남성,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백인/유색인 등의 이항 대립적 위계 질서를 기반으로 구성된 범주들은 타자와의 ‘차이’와 ‘차별’을 통해서 근대적인 자아 정체성의 기반을 마련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의 역사는 ‘타자’의 차용 appropriation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수반한다(Kuhiwczak 1995:118). 근대적인 역사적 과정상에서 확고하게 구획되어져왔던 모든 경계들이 그 견고성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 문화 연구의 한 방법론으로서 문화번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화 연구에 있어 ‘번역’과 ‘횡단’에 대한 관심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탈식민주의 비평과 비판 인류학에 의해 고무된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의 조건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 공간, 국가적 경계들을 넘나드는 초국적 흐름들이 활발해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이질적인 상징 체계들간의 ‘교섭’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고, 또한 근대적 주체를 구성해왔던 많은 지식과 전제들이 ‘재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독립 학문 분야로 등장하기 시작한 번역학에서의 ‘문화적 전환’이라 불리는 흐름들도 문화 번역이 문화 연구의 주요한 연구 분야가 되는데 기여하고 있다.

       문화적 접경지대가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는 현재의 글로벌 사회에서 문화 번역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이질적인 것들이 교류하고 교차되는 문화적 접경지대는 견고한 경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던 사람들에게 접경지대 히스테리(borderlands hysteria)를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고 말하여지지 못했던 의미들이 새롭게 드러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평가된다.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와 번역을 통한 ‘변형’의 공간으로 문화적 접경지대는 ‘문화 번역’의 정치적인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으며, 번역자의 행위성과 번역의 효과 등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 번역을 새로운 문화 연구의 현장으로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번역’이라는 의미에 부착되어왔던 많은 전제들을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본 논문은 문화 번역이 근대를 성찰하는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루고자한다.

       ‘문화번역’은 번역이 이루어지는 특정 시공간적 맥락과 문화 번역의 행위자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는 총체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문화 번역을 역사적으로 추동해 왔던 힘들은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것은 ‘문화’의 개념과 방법론을 정의해왔던 근대적 지식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론적 연구 주제로서 문화 번역의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타자와의 대화적 관계(dialogical relations)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번역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문화번역’을 둘러싸고 행해져왔던 다양한 권력 메커니즘을 짚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


2. 문화의 개념과 문화 번역


       전통적으로 문화를 다루어왔던 문화 인류학은 시간과 문화적 차이로 구획된 경계를 횡단하여 상호간의 이해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번역의 예술’임을 주장해왔다. 인류학자가 생산하는 민족지(ethnography)는 바로 이러한 번역의 결과물로 이해되어왔다. 고전적인 문화 인류학에서 원전에 해당하는 타문화를 다루는 문화 번역자로서의 서구 인류학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상상되었다.


       옛날 옛적에 <고독한 민족지학자>는 <그의 원주민>을 찾아 석양속으로 말을 타고 떠났다. 그는 많은 시련을 겪고 아주 먼 나라에서 원하던 대상을 만났다. 그곳에서 <현지조사>라는 궁극적인 시련을 감내하면서 통과의례를 치러냈다. <자료>를 수집한 뒤에 <고독한 민족지학자>는 본국으로 돌아와서 <그 문화>에 대한 <참된> 설명을 써냈다(로잘도 2000:70).1)


       고독한 민족지학자를 번역자로, 그의 원주민을 번역의 원전으로, 현지조사를 이중언어 사전을 뒤적이며 원전의 언어에 상응하는 번역의 언어를 찾아 고심하는 과정으로, <그 문화>에 대한 <참된> 설명을 ‘번역된 텍스트’로 대치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화 번역자로서의 인류학자의 이미지를 지배해왔던 이러한 수사학은 인류학이, 특히 서구의 인류학이 타자의 ‘문화’를 어떻게 정의해왔는가를 보여준다. 타문화는 ‘저기 바깥'에 놓여있는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그 문화는 시간과 역사적 맥락에 구애받지 않는 정지된 상태로 보여졌다. 문화에 대한 고전적인 인류학적 사고는 타자의 문화를 기술할 때 ‘현재 시제’를 사용했는데, 이는 타자의 문화에서 행위자의 관점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인류학자는 그 집단의 문화적 존재에 대한 지적 독점권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흔히 ‘민족지적 현재’(ethnographic present)라고 불리는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당시 인류학에서 다루던 ‘문화’의 중심 개념인 구조, 관례, 규범 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서, 한 집단의 구성원이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는 가정하에, 타자의 삶 자체를 ‘표준화’해서 기술하는 글쓰기 방식이었다(로잘도, 위의 책, 89).2) 특정 문화권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들은 결국 그 문화의 본질에 대한 일반화를 도출하기 위해서만 사용될 뿐이었다. 모든 문화적인 세부 사항들은 ‘마치 프로그램화된 문화적 절차인양 묘사’되며, 관찰자로서의 문화인류학자는 이것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중재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켜왔다. 이렇게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여야 진정한 객관적 사실에 도달한다는 근대적 지식 체계에서의 신념은 번역의 행위에 관여하는 ‘권력’을 간과해왔다. 어떤 문화적 번역자도 자신의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두 문화간의 ‘거래의 조건들’에 관여하는 권력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우선 이러한 고전적인 방식의 문화 번역의 작업은 ‘문화 횡단’의 필수적인 요건인 문화들의 동시대성을 거부했다는 점이다(Fabian 1983). 문화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란 잘 짜여진 망이라기보다는 이성, 감정과 충동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경험되고 실천되며, 변화되는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규율화된 질문들에 의해서는 타자의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이론이 생산되어질 수 없었고, 타자들은 늘 항상 시간이 정지된 상태로 ‘분석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위치지어졌다. 이렇게 타자, 주로 비서구의 문화를 불변하는 실체로 보는 ‘몰시간성의 환상’이라는 인류학적 수사학은 결국 ‘타자의 발견’을 주도해왔던 식민지 시대의 권력의 집행을 위해 필수적인 ‘시공간적 거리두기’(allochronic distancing)의 인식론으로 이어진다(Fabian 1983). ‘시공간적 거리두기’는 타자를 자아와는 다른 시간, 공간적 지점에 위치시킴으로써, 둘간의 메울 수 없는 ‘문명적 격차’를 상정하는 것이다. 타자에게 동시대성을 거부하는 이러한 인식론은 제국주의적 법질서, 종교, 생활 양식 등이 ‘계몽’과 ‘문명화’ 사업이란 이름 하에 피식민지인들에게 이식돼야 한다는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 그들이 사용한 문화적 힘의 근거는 근대-전통, 문명-야만, 진보-정체 등의 이분법적 도식 하에 타자에 대한 백인의 의무(White man's burden)를 강조하는 것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제국주의적 권력이 집행될 수 있는 ‘문화적 근거’를 제공해왔다. 동시에 타자들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구가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고 있는 동경과 향수의 대상으로 미화되어졌고, 옛 조상들의 원시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박물관의 전시물로 인식되어졌다(Corbey 1995).  자신들을 ‘문명화된’ 관찰자의 입장으로 위치시킨 문화번역자들은 타자의 문화를 지나치게 이국적인 것으로 독해하는 경향을 보였다(Palsson 1993). 이러한 경향들은 현재에도 문화 번역의 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으며, 시간성이 배제된 타자는 동일한 공간과 동일한 시점에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주체로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타자의 문화적 차이가 강조되는 것이 타자가 아직 합리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개념화되거나 보편적인 이성에 도달하지 못한 개념으로 이해될 때 ‘문화’란 타자의 타자성을 드러내는 기표로서 작동된다.

       문화 진화론적 시각을 비판하고 등장한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 역시 중심의 관점에서 모든 타자의 문화적 차이의 평등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여전히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서 진행되온 문화 번역의 과정을 잘 다루지 못하고 있다. 각각의 문화들이 분리되어 있고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은 각 문화가 구성되어 왔던 과정에서의 상호 주고받았던 영향이나 결절(articulation)을 놓치기 쉽게 만든다. 과도한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은 이런 점에서 식민제국이 행사한 권력을 통해 ‘변형’돼온 타자의 동시적인 존재에 대해 간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총체라는 단위에 주목함으로써 문화 단위간에 이루어지는 무수한 교차점이나 접경지대를 소홀히 다루었다. 

       로잘도는 “고독한 민족지학자가 그의 후계자들에게 물려준 성스러운 꾸러미 속에는 제국주의와의 공모, 객관주의에 대한 헌신, 기념비주의에 대한 신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72)고 적고 있다. 문화 번역자는 이러한 유산들의 수혜자로서 의심할 수 없는 신뢰의 위치로 자신을 설정했다. 문화번역자는 변화하는 문화적 현실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쓰는 수사적 관행에 의해 권위적인 객관성을 확보해왔다. 특히 “이론들은 부침이 있지만 훌륭한 민족지 혹은 번역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성취로 남아있다”는 기념비주의에 대한 신념은 자신을 최고의 번역자로 자부하는 경쟁과 각축의 장으로 몰아넣었고, 가장 ‘현지인의 관점에 충실하다거나,’ ‘타자의 문화적 정수를 밝혀냈다’라는 주장들이 문화 번역자로서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이러한 기념비주의에 대한 신념은 또한 오랜 동안 텍스트 번역을 지배해왔다. ‘번역은 투명함의 시학(the poetics of transparance)에 근거하여 가장 상응하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Godard 1990:91)이라는 주장은 번역자를 중립적이고 초월적인 매개자로 상정해왔다.

       이러한 주류의 이론들은 최근 두 방향에서 도전받고 있다. 하나는 번역의 투명성에 대한 강조가 원전 텍스트의 문화적 흔적들을 없애버리고 번역자의 자성성을 배제한다는 점이다.3) 또한 번역이 특정한 맥락에서 일어하는 사건이나 행위라는 점이 간과되면서, 번역자가 원전을 ‘읽고’ 그것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수행성’이 지워진다는 점이다.4) 번역의 행위는 암호를 푸는 해석적 행위(decoding)와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내는(re-encoding)을 포함하는 개념이지, 코드와 코드를 횡단하거나 초월하는 행위transcoding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초월적인 관찰자가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분석하는 것이 더 이상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식은 단일한 분석 방식으로부터 복수의 분석방식으로 옮겨가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시학, 서사분석, story-telling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적 텍스트(원전)와 문화적 텍스트(번역된 텍스트)간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대한 강조는 두 개의 다른 상징과 의미 체제와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번역자가 두 가지 상징 체제를 조정, 조작하는 측면이 바로 문화 번역의 정치학이 개입되는 부분이다. 문화 번역의 정치학은 번역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 질서로의 편입을 용이하게 하거나, 번역된 텍스트의 대상 집단의 ‘읽는 효과’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만들어 내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근대적 경계들의 교차와 다중적 언어와 의미들의 절합을 통해 드러나는 ‘권력’을 분석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3. 문화 번역자: positioned subject


       문화 번역자가 적극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하는 자로 정의된다는 점은 우리에게 번역의 행위와 관련된 정치학에 관심을 갖게 한다. 문화 번역자의 관점은 관찰 자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지식과 권력은 서로 연계된다(로잘도, 2000). 그러므로 문화 번역자는 특정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도록 ‘위치지워지는 주체’(positioned subject)로 설정된다. 문화 번역자는 자신의 연령, 성별, 성적 지향성, 계급, 인종, 정치적 성향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어떤 문화적 현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다른 것에는 완벽하게 무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번역자는 ‘초월적인 관찰자,’ ‘엄밀한 언어학자’가 아닌 그 자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문화화된 행위자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텍스트의 다의성과 해석의 다의성을 인정하는 것은 원전을 훼손한다기보다 번역자의 지위를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의미이다.

       현지 조사는 인류학자들에게 있어 다른 문화와 교섭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는 일련의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해석’의 과정을 수반한다. 텍스트의 번역자도 텍스트를 구성하는 다양하고 중층적인 의미 체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번역자의 관심이나 지식 정도에 따라 번역되는 의미들은 많은 차이를 갖게 되고 모든 번역은 이런 의미에서 부분적이고 편파적일 뿐 아니라, 의도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근거로 ‘문화’을 이해할 때, 문화 번역자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문화인류학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개인은 초월적인 자아를 구성할 수 없다는 바로 그점 때문에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 번역자의 위치에 있다. a문화 번역자는 문화의 교차로에서 문화의 흐름을 매개하는 행위자이다. 그러므로 문화 번역자의 자아는 다중적인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며, 문화와 권력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즉 그들의 번역 행위는 “인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이고, 윤리적인 것”의 속성을 담고 있다. 최근의 탈식민적 문화 비평과 페미니즘은 ‘문화 횡단’과 ‘문화 번역’에 대한 분석의 지점들을 발전시켜왔다. 식민지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진행되는 번역과정은 두 이질적인 문화간의 기호와 언어 상의 ‘등가성’을 만들어내는 제국주의적 이중언어 대역 사전의 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힘이 있는 쪽에 의한 일반적인 언어의 변형 과정이라기보다는 양가성이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크라니어스커스 2001). 다음에서는 번역 과정에 개입되는 차용, 모방, 다중성에 대한 의미를 살펴본다.

       

1) 번역과 차용


       셍굽타Sengupta(1995)는 비서구인으로 최초로 노벨상을 탄 인도 시인 타고르Tagore가 벵갈리어로 쓰여진 원전을 어떻게 에드워드식 영어로 전치하면서 원전의 톤, 이미지와 어휘들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타고르 자신이 번역한 그의 시는 식민주의자가 동양의 타자를 바라보던 전형성에 스스로를 부합시키고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번역에 있어 타겟 대상이 갖고 있는 문화적 가치와 힘이 얼마나 번역자의 태도를 형성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벵갈리 사회의 아방가르드 시인이었던 타고르를 동양의 성인이며 위대한 예언자로 변형시켰던 ‘번역된 텍스트’로서의 그의 시는 타고르 자신이 문화 번역자로서 갖고 있던 정치학을 잘 보여준다. 서구가 동양에서 바라보았던 신비주의에 대한 갈구와 타고르 자신이 서구 세계에 대해 ‘유혹적인’ 동양으로 보여지고 싶은 욕망은 타고르를 서구의 기독교적 교화를 동양의 신비주의적 방식으로 실현하는 현자로 위치지게 했다5). 이러한 상호적인 차용은 식민지 시대에 정치적 효과를 발휘했을 뿐 아니라, 후에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서 타고르가 아시아인의 자부심을 세워준 인물로 상징화되면서  self-orientalism의 전형이 만들어지는 것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타고르의 시에 대한 서구의 열망은 바로 자기 자신이 파괴했던 것을 갈망하는 ‘제국주의적 향수’로 이해될 수도 있다.  또한 타고르는 영국의 식민 권력의 문명화 사업에 의해 생산된 ‘검은 원숭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검은 원숭이6)는 식민 권력의 불안을 가중시켰던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의 지식인들을 상징하며,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자를 ‘모방’함으로써, 영국인과 흡사하거나 우수한 능력을 보였고, 급기야 백인 지배자와 대등한 위상과 권리을 요구하기도 했다(이옥순 52). 문화 번역자로서 이들은 이질적인 문화의 ‘차용’을 넘어 ‘혼종’을 상징하며 식민 지배자의 정체성을 위협했다. 이런 의미에서 바바에 의해 개진된 식민 담론의 ‘미끄러짐’의 의미는 문화 번역에서 상정되는 의미의 등가성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탈식민주의 문화 전략을 상정한다.

       원형의 반복이 결코 원형과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번역 과정은 항상 ‘원형’을 불안정하게 하는 ‘결여’를 배태한다. … 식민담론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또한 그 불완전함을 증폭한다.” 이러한 식민 담론의 ‘미끄러짐’은 제국의 중심부에서 생산된 특정한 생각, 서사, 이론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바트 무어-길버        트,2001:281).


       바바의 탈식민 전략은 “식민지 지식을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권력 의지”(위의 책, 275)로 파악하기보다는 피식민 주체가 경험하는 ‘분열된 시간성’을 통해 근대성의 기획에서 드러나지 못했던 사회적 모순, 정치적 정체성, 혼종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발화 양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바트 무어-길버트, 2001:292). 강내희(2001)는 신식민지 지식인들의 주체를 구성하는 흉내내기, 잡종적 성격 또한 서구에 합류하는 가능성과 패러디를 통해 비판하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문화 횡단이라는 번역 작업을 하다보면 식민권력이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지 못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식민권력의 ‘이접’을 통해 일방적으로 피식민지의 문화가 변용되거나 종속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크라니어스커스 2001:317). 스페인의 정복을 당한 타갈로그인들의 기독교로의 개종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Rafael(1988)은 스페인의 선교사들은 신의 구원의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 그 지역의 고유한 토착 언어를 다시 부활시켜야 했으며, 피식민지인들은 두 상징 체계간의 번역 불가능성 때문에 설교를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낚시를 하듯(fishing) 순간 순간 단어를 건져냈으며, 해석 과정에서도 자유로왔다. 이런 상황은 결국 식민 제국의 언어적, 정치적 권력을 불안하게 했다. 이 상황에서 문화횡단은 “종속적 주변적 집단이 지배적 또는 메트로폴리스 문화에 의해 그들에게 전해진 재료들을 선별해서 그로부터 뭔가 창안해내는 접촉지역의 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매리 루이스 프랫, 크라니어스커스, p318에서 재인용).  

       또한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 번역의 작업들은 ‘차용’과 ‘다의성’에 대한 글로벌 상황에서의 예들을 제공하고 있다. 왕 샤오밍은(2001)은 중국에서 1980년대 서구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서적들이 대규모로 번역되고 있는 현상을 ‘번역황금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번역 활동을 조직해 낸 번역 그룹들은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리고, 전문적인 번역자 출신이 아니다. 중국의 전시대 30년을 주도해 온 번역이 “주로 공식적인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고 공식적인 공산당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되었다면”(336) 새롭게 부상한 신진 번역가 그룹인 ‘청년지식분자족’은 ‘번역’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고 이러한 ‘서구’의 번역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해내고 있다.7) 중국의 오랜 역사 안에서 또 하나의 진정한 ‘재생’을 시작한 역사적 교차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의 번역 사업은, 왕에 의하면, 중국 사회를 ‘사회 사상 변혁의 전장’으로 변형시키는 정치학을 만들어낸다. Stefansson(1993)은 일본의 ‘코믹 만화’들이 중세 유럽과 바이킹의 문화적 이미지들을 그 문화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차용하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상품화 전략에 동원되는 문화 번역의 예를 들고 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문화 차용에서 성공적인 번역이란 원전을 그대로 원전의 의미대로 보전하는 것이 아니다. 코믹 만화의 독자들을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일본적인 요소들을 바이킹의 세계에 부과하는 착종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2) 여성 번역자: 에스페란자 정체성의 출현


       문화 번역은 인간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문화적 힘으로 작동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상징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힘의 가장 주요한 원천이 되어왔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상징은 식민과 피식민, 전통과 현대, 민족과 민족, 인종들간의 대립, 집단간, 국가간의 교차가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이러한 문화 횡단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동원되는 문화적 힘으로 작동되어왔다. 치카노 문학과 역사적 서사는 ‘번역’의 과정에 작동되는 이러한 힘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멕시코 영웅 서사의 전형은 전적으로 남성 영웅 서사로 그려져왔다. 이때 ‘차이’로 구별되는 여성의 위치는 모호하게 남게 된다. 백인들의 제국주의적 권력에 맞서는 멕시코 남성들은, 실질적인 힘이 부족한 상태에서, 신화적인 힘을 통해서만 저항적인 주체로 설 수 있었고, 이를 위해 남성 영웅 서사는 원초적 가부장제를 복원시킴으로써 저항적 힘을 만들어나간다. Behar(1993)는 멕시코 남성들의 역사적 상상력 속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여성의 이미지의 하나로 ‘La Malinche’를 들고 있다. 스페인의 정복자 Cortes와 멕시코 남성 영웅 사이의 정치적인 적대감은 사실 코르테스의 연인이며 통역자였던 La Malinche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문화 사이에서 지배를 매개하고 성적인 교환을 만들어내는 여성으로서의 La Malinche는 그후 ‘번역자’와 ‘반역자’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역사적 상징으로 남게 된다. La Malinche로 상징되는 여성은 외부 세력의 영향에 쉽게 동화되고 오염되기 쉬운 존재로 이미지화되는 가부장적 상상력의 기초를 제공해왔다. 결국 통합된 주체로서 자신을 설정해왔던 멕시코 남성 영웅의 서사들은 문화적 경계에 선 여성과 그들의 성적 오염을 연결시키면서 멕시코 역사를 남성 영웅사로 ‘번역’해왔으며, 여성성, 섹슈얼리티, 번역과 반역 사이의 의미 있는 상징 체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적 남성 서사는 페쇄적이고 닫힌 가부장제를 조롱하는 치카노 문학들의 등장으로 사라져가고 있고, 새로운 치카노 정체성인 에스페란자의 출현으로 탈중심화되고 있다. 에스페란자(Esperanza) 또는 메스티자Mestiza는 여러 문화와 언어가 교차하는 접경지대에 위치하는 여성들이다. 이는 멕시칸계통의 사람들이 이민과 이주를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 안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다중적 주체들이다. 이는 실질적인 이주에 의해 새로운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여성 주체뿐만 아니라, 전통적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적 가부장제 등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매개하거나 저항하는 상징적인 여성 주체를 상정하기도 한다. 상징적인 욕망과 위협의 세계는 그녀 내부에서 다중의 주체가 교차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그들이 문화적 경계(borderlands)에서 하고 있는 문화 번역의 글쓰기들은 최근 여성주의 이론과 탈식민지 이론의 발전에 자극을 주고 있다. 실제 로잘도에 의하면 에스페란자 정체성은 치카노 사회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해방적 상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문화들을 매개하고 문화들이 부여하는 무게와 의미들을 내부에서 해석하고 통합하는 다중적 주체로서의 에스페란자들의 등장(로잘도, 2000: 236-237)은 여성 문화 번역자를 ‘반역자’의 지위로부터 ‘근대적 억압의 해방자’로의 지위로 격상시켜내고 있다. 그들은 대안적인 문화 공간을 제시하고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세계를 체험하고 이와 타협하는 새로운 주체들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중적 주체는 문화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위치없는 주체가 아니라, 주변화된 타자의 특수하고도 복잡한 역사적 정체성을 지시한다(Anzaldua 1987).  에스페란자가 ‘욕망과 위협의 세계’, ‘싹터 오르는 섹슈얼리티와 위험한 남성적 폭력의 세계’, ‘물질의 유혹과 착취되는 몸의 글로벌 자본주의하’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을 대표한다면, 이미 많은 여성들의 현실적인 삶의 조건이 다중적인 경계의 기반위에서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주의 담론에서 번역은 이런 의미에서 재생산이 아닌 새로운 생산으로 이해되고 있다(Godard 1995; Simon 1996). 단일한 의미와 진리를 만들어낸다는 모든 가정들은 유보되어지고, 번역은 수행성을 통한 변형으로 이해되고, 다중적 여성 주체들의 발화는 근대성의 경계들을 해체시키는 문화 비판으로 인식되고 있다.


4. 맺음말


       번역의 작업은, 그것이 체험되는 타자의 문화이든 문학작품 등의 텍스트나 영화 등의 비주얼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던 중립적이거나 순수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문화번역은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오역, 농담을 이해 못한 것, 언어의 이중적 의미를 간파하지 못한 것 등이 문화 번역에서 흔히 일어나지만 이는 어떤 경우, 단순한 의사 소통 상의 혼돈이라기보다는 체계적으로 형성돼온 오해일 수 있다. ‘문화’는 시대마다 상황마다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왔고, 그 정의의 모호함과 중층성은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성을 갖고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적인 자본의 흐름을 매개하는 문화 번역의 경우는 Hannerz(1993)가 지적한 ‘문화충격방지산업8)’으로 귀착되기도 한다. 탈식민지 지형에서 이루어지는 문화 번역은 로잘도가 지적했듯이 다양한 이질성과 정체성간의 ‘상관된 지식’을 구성하는 행위이다.9) 상관된 지식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유동하는 공간과 교차하는 다양한 경계들에 대한 열린 눈을 필요로 하고, 급격한 문화적 동요와 이질성이 돌출되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문화 번역자의 정치적 감각이 요구된다.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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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1999),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서울: 푸른역사.

바트 무어-길버트, 이경원 옮김(2001),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서울: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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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샤오밍(2001), “번역의 정치학-1980년대 중국 대력의 번역 운동,” 흔적 1:333-362.

존 크라니어스커스(2001), “번역과 문화횡단 작업,” 흔적 1:315-332.

Anzaldua(1987), Borderlands: La Frontera, San Francisco: spinsters/aunt lute.

Behar, Ruth(1993), Translated Woman, Boston: Beacon Press.

Co, Raymond(1995), “Ethnnographic Showcases, ****-****," In Jan Nederveen Pieterse        and Bhikhu Parekh, eds. The Decolonization of Imagination,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Fabian, Johannes(1983), Time and the Oth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Godard, Barbara(1995), Theorizing Feminist Discourse/Translation," In Susan Bassnett        and Andre Lefevere, eds., Translation, History & Culture, London: Cassell.

Hannerz, Ulf(1995), “Mediations in the global ecumene," Palsson, Gisli, e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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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hiwozak, Piotr(1995), Translation as Appropriation: The Case of Milan Kundera's        The Joke," In Susan Bassnett and Andre Lefevere, eds., Translation,            History & Culture, London: Cassell.

Palsson, Gisli(1993), ed., Beyond Boundaries: Understanding, Translation and            Anthropological Discourse, Oxford/ Providence: Berg.

Rafael, Vicente L(1988), Contracting Colonialism: Translation and Christian Conversion        in Tagalog Society under Early Spanish Rule,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Sengupta, Mahasweta(1995), Translation, Colonialism and Poetics: Rabindranath Tagore        in Two Worlds," In Susan Bassnett and Andre Lefevere, eds., Translation,        History & Culture, London: Cassell.

Simon, Sherry(1996), Gender in Translation, London: Routledge.

Stefansson, Halldor(1993), Foreign myths and sagas in Japan: the academics and the        cartoonists," In Palsson, Gisli, ed., Beyond Boundaries: Understanding,          Translation and Anthropological Discourse, Oxford/ Providence: Berg.



1) 이러한 이미지는 인류학이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 설립된 19세기부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서구의 중세부터 존재해 온 ‘Homo viator’의 이미지는 타자와 접촉하는 서구인들이 타자의 문화를 차용해온 방식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Homo viator는 먼 곳으로 순례를 떠나 이상스럽고 특이한 이야기, 에로틱한 모험담, 위험했던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가득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서구의 여행자를 의미했다 (Gisli Palsson 1993:6).

2) 로잘도가 인류학의 고전시대(****-****)라고 불렀던 시기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표준하하는 기술이 객관성을 독점하고 있었던 때’로 요약된다(98)

3) 1980년대 인류학 안에서는 ‘텍스트로서의 민족지’를 표방하는 연구물들이 나왔고, 실험적 글쓰기를 통해 인류학 내부에서 제기된 윤리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했다. 탈식민주의나 페미니즘에 영향으로 문화 자체가 역사적, 정치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문화 자체가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 문화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논의함으로써, 문화를 맥락에서 벗어난 추상적인 실체로 다루는 것등에 대한 인류학 내부의 자성적인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4) 이런 의미에서 Godard는 번역자는 기계적으로 언어를 옮기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원전에 대해 ‘종’의 위치로 개념화된다고 주장하고 있다(91). 20세기를 지배했던 번역에 대한 이론은 번역은 복사(a copy) 이며 창조적인 발화(utterance)가 아니다라는 신념을 강화시켜왔다.

5) Sengupta 는 타고르의 시에 대한 서구의 열정은 당시 서구의 시대적 맥락에서 오는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감정에 기인했다고 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타고르의 시는 후에 서구의 문학자들에 의해 곧 잊혀져갔는데, 1차 세계 대전 이후 시에 대한 서구의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급격하게 변화된 사실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6) 검은 원숭이는 키플링이 붙인 경멸적인 용어로 끊임없는 모방을 통해 식민 권력자를 닮아가는 인도의 지식인들을 의미했다.

7) “그들은 현대 중국의 인민들이 그들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으며 그 과정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기인하여, 첫 단계는 현대 서구사상을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들 철학 사상을 심도있게 비평하는 것이며, 이 단계를 거친 연후에야 비로서 세 번째 단계인 다른 민족들에 뒤지지 않을 사상과 철학적 담론의 체계를 중국학자 자신이 정립하는 것이다 (338-339)

8) 문화충격방지산업culture shock prevention industry 이란 문화간 이해를 증진한다는 목적하에 다국적 기업의 사원들을 포함하여 국제적인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단순한 지식과 추상적인 인류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일종의 문화 교육으로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사업이다.

9) “예전에는 차이에 대한 연구가, 비가시적인 채로 남아있는 <자아>와 대조하여 정의되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사회적으로 명확한 정체성 사이에서 드러나는 유사성과 차이 간의 놀이가 된다.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들>과 <우리> 양자 모두가 <문화의 해석>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끌고 당기는 상관적 이해의 형식을 띠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국 문화 번역은 ‘상관된 지식 relational knowledge'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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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생명, 그 뿌리는 정신이다
문화관련 글들(ktp) | 2008/02/29 08:39

문화는 생명, 그 뿌리는 정신이다.


권병길(연극배우, 영화배우)

<공공의 적> 등 다수 영화 출연


우리의 긴 역사는 강대국들의 수없는 침략과 식민지 하에서도 문화를 잃지 않고 살아 온 역사이다. 문화는 곧 생명, 그 뿌리는 정신, 곧 우리의 정체성이다. 어느 민족 국가에도 문화만 지켜지면 강대국의 식민지하에서 다시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사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세계화 아래 새로운 자본의 침략이 소리 없이 한반도를 덮고 있다. 그 자본의 힘은 지켜야 할 우리의 가치를 흡수하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의 식민지화에 경각심을 갖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도사리고 있는 독소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숭례문, 조선왕조 초기에 건축된 600여년의 자존심, 그 생명이 불에 홀딱 타 버렸다. 불을 지른 사람은 이 사회가 만든 인격체이며, 억울하다 분풀이를 무책임 무관리의 틈을 타 숭례문을 선택한 비열한 사람이다. “다시 복원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 바로 그 말은 어쩌면 이 사회의 자화상 아닌가? 문화재 생명은 끝난 것 같다. 아무리 돈을 발라 첨단 재목과 공법을 쓴다 해도 조상의 땀과 얼, 지나온 역사는 재로 변했음을 똑똑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기초가 안 된 사회, 막 내린 정부에서 생긴 일이니 막 오른 정부는 다행이라고 미소 짓는 사람들...... 이 책임은 분명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구청, 문화재청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반(反)문화의 소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청계천 복원도 좋고, 운하도 좋고, 새만금 막아도 좋고, 골프장 넓히는 것도 좋다고 하면서, 아파트 건축을 올리고 또 올리는 반문화 의식. 그러나 서민과 농민들 허리가 휘는 것은 끝없이 계속되어 왔다. 자동차 시대에 농촌을 뒤엎고 산을 뚫어 길을 낸 도로를 달려가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은 무수히 파괴되고 천박한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여기저기에 꿈틀대고, 먹고 마시고 놀고 잠자면서 돈만 있으면 나라님 행세할 수 있는 것은 졸부 문화의 현주소다. 이뿐인가? 문화의 전당이란 이름 붙인 문예회관은 지방자치의 숙원 사업으! 로 타 지역보다 더 크게 경쟁하듯 수백억을 들여 전시용 건축을 하고 내용도 없이 농촌의 삶과 부조화를 이루니, 괴물 같기까지 하다.


이러한 문화 의식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35년의 식민지하에서 지금까지 우리의 주인의식이 말살되고 문화 정체성이 목 조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 문화의 위기를 알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영화를 필두로 방송·서비스 분야, 예술·문학 저작권 등이 위기를 맞고 있고 미국의 짝퉁 문화에 끼어 변질된 모습이 되고 있다. 한미FTA 이전에도 미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불가능한 관계가 없었다. 한미 군사 협력, 무역, 교류, 여행, 이민, 유학 등 어느 하나 빠짐없는 수교국인데 한미FTA를 해야 더 잘 살 수 있다는 논리이다.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잘사는 것이냐? 경제적 이득만 있으면 우리의 정체성은 잃어도 되는 것인가?


이미 지난 해, 스크린쿼터, 소고기, 자동차, 의약품은 한미FTA 선결 조건으로 양보하여 본격적인 쌍무 협정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 영화 의무상영일 수를 145일에서 73일로 축소, 헐리우드 영화의 영역을 넓혔다. 우리 영화계는 적자 속에 허덕이고 있다. 1/4분기 우리 영화 점유율은 61.6%에서 48.9% 하락한 반면, 미국 영화는 26.4% 상승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 영화계에서는 제작여건 위축, 투자회피, 제작편수 축소, 영화의 질적 저하, 인력 실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왜 미국은 스크린쿼터 축소를 주요 의제로 강제했던가? 그것은 전 세계의 80% 이상을 미국 영화가 장악하고 있고, 그 영화 산업은 미국 주요 산업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것은 점점 없어지고 미국 문화로 대체해도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얘기를 보고 듣기를 원한! 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 정서, 혼으로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안고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남북화해 정책의 중심에 한미FTA 타결을 두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취임한 이명박 정부가 우리 전통과 문화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 자유무역협정 찬성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문화는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치적 힘을 인간회복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하며,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안내자인 것이다. 그 증거로 평양에서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연주가 전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진행된 것을 들 수 있다. 긴장되고 있는 북미관계에 새로운 햇빛이 비쳐지리라 기대해 본다.


이제 한미FTA 비준 통과 절차는 국회로 넘어 갔다. 미국 역시 의회 인준을 남겨 놓고 있다. 우리 국회는 FTA 협정을 처리하기 전에 지금까지 열거한 각 민족과 국가의 문화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유네스코의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 협약은 경제적 잣대로 보는 강대국의 패권에 맞서 민족과 자국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만든 국제 협약이다. 문화를 지키기 위해 이 협약에는 이미 70여 개국이 그 뜻에 찬성, 가입했으며, 우리 정부 역시 그 협약의 중요성을 알고 찬성, 가입했다. 이 협약에 반대하는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 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미국이 자본의 독점을 통해 문화를 독점하겠다는 야만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리 국회 역시 유네스코의 문화 다양성 협약의 국회 비준을 미루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국회 이전에 FTA를 주도한 외교통상부가 국회에 이 협약에 대한 비준 동의 요청을 하지 않은 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미 FTA 시작이 스크린쿼터 축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미국에 조공으로 바친 스크린쿼터 축소의 문제점을 은폐하고 미국 영화 산업에 일조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우리의 창작 권리를 근본부터 흔드는 FTA 협정은, 반민족, 반민주, 반문화의 협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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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ㅣ라고 하는가?
문화관련 글들(ktp) | 2007/10/24 22:02
문화란 무엇인가? 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는가?


우리는 지금 문화라는 단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이 주요 이슈로서, 21세기의 세계적 과제로서, 한 국가가 이루어야 할 목표로서, 인생설계의 지표로서, 전문가들의 학술적 담론으로서, 그리고 평소 대화에서의 화두(話頭)로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엄청나다. 그것은 일상에서 심리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가 하나의 힘, 권력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일 수도 있고, 우리를 억압하는 힘일 수도 있다. 모더니티의 여명기에 “아는 것이 힘”이라 했듯이 포스트모던의 이론적 병앓이를 겪은 지금 “문화가 힘”이란, 의욕적이고 능동적 표현일 수 있다. 반면 문화라는 단어 자체가 대중에게 휘두르는 권력은 전체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에 우리는 수동적 피해자가 된다.

고대로 부터 명민한 인간사고의 기본과제중 하나는 한 사회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언어와 그 부수적 작용의 ‘올바른 비중’이 무엇인가를 검토하는데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대화 상대자들로 하여금 토론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술어를 다각적이고 지속적으로 정의해 가도록 끈질기게 유도하는 것은, ‘술어의 논리적 정의(定義)’에 이르고자 함에 그 근본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언어와 그 사회적 사용의 효과 및 그것이 지칭하고자 하는 현상이 지니고 있을 수 있는 ‘옳지 못한 힘’을 떨쳐내는 데 있었다. 여기서 ‘힘’이란 일반인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1. 문화의 개념적 특성

문화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문화 개념의 문제다. 문화는 이미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이지만, 그 다의미어적(多意味語的) 성격으로 인해 개념과 정의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통합적 의미에서 출발해 논지를 전개하기란 쉽지 않을 뿐더러 담론의 실용적 효과를 얻기 어렵다. 다만 상이하게 사용되는 정의들의 의미공통분모를 찾아 볼 수 있으며, 각 정의들의 연관성에 관한 분석의 과정이 곧 문화의 개념을 재정립해줄 수 있다.

문화에 ‘대한’ 담론은 문화라는 화두를 ‘통한’ 담론이라는 성격이 다른 어떠한 언어를 사용할 때보다도 강하다. 문화는 ‘대상 지칭 언어’라기 보다는 ‘방법 매개 언어’로서의 기능이 두드러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라는 말의 특징 가운데 매우 중요하면서도 쉽게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곧 자세히 살펴보겠지만(1.3.) 문화의 개념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중요 논쟁 거리였다. 그래서 이에 지친 학자들은 문화 개념에 관한 논쟁의 진부성을 지적하기도 한다(서구에서는 20세기 초에 이러한 경향이 크게 부각되었었다). 혹자는 “문화란 무엇인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사람의 지나친 천진성을 비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렵고 그 논쟁이 진부하더라도 이 문제를 끝까지 회피할 수는 없으며, 언제까지나 상식이 보장하는 묵계적(黙契的) 정의(定義)의 보호벽 안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소멸시키기 보다, 오히려 창조적 자세를 갖고 문제 의식을 유지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문화라는 말의 사용 빈도가 점점 영향력 있게 증가하고 있으며, 다른 단어들 보다 어의(語義)적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질문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일상적 욕구가 상존하는 한 완전히 유보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1. 문화라는 언어의 유형적 차이

먼저 문화가 다른 언어들과 유형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유형의 질문들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관찰해 보는 것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연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그리고 ‘문화란 무엇인가’

연필은 협약된 언어로 지칭되는 대상이 곧 감지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감각에 의해 즉각적으로 확인 가능하며, 그 주된 기능을 간단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그 의미가 조작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연필의 역사에 대해 책을 쓰든, 연필이란 소재(素材)의 시와 소설이 은유를 극대화하고 다차원적 상징화를 시도해도 대상의 본질적 의미 소재(所在)는 혼돈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인간 자신의 끊임없는 질문이고, 사상가들의 저서와 논문의 주제이자, 유명 인사들의 강연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던짐은, 대상에 대한 협약 언어가 부재하거나 그 언어의 실체적 대상이 모호하거나, 아니면 대상의 실체적 감지가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때론 옆집 아저씨가 “인간적이지 못하다” 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즉각적 실체가 고양이나 소나무가 아니고 사람인줄 안다. 복합적 존재로서 인간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은 계속 남아 있으나, 인간이라고 하는 일차적 감지 대상의 실체가 없거나 다른 대상들과 현상적 혼돈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반면 경제는 만질 수 있는 즉각적 감지 대상으로서 실체가 아니다. 경제는 원천적으로 구체적 대상물에 대한 지칭 언어가 아니라, 일정 현상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다. 다시 말해, 그 언어 형성의 원천적 동기가 본질적으로 인식적(認識的) 욕구에 의한 개념화 작업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논리성과 역사성을 강하게 내포하며, 언어 사용자의 폭넓은 인식적 동의를 요구한다. 경제란 그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개념으로서의 자기 영역이 분명한 편이어서 여타 현상과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다. 재화, 상업, 금융에 관한 것이 경제 현상이라는 데에 즉각적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며, 선거와 정부 구성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 현상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따라서 상식적 맥락에서의 묵계적 정의(定義)의 보장도(保障度)가 높은 개념어(槪念語)이다. 다수의 개념어들, 예를 들면, 정치, 교육, 예술, 종교, 체육, 관광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문화도 일정 현상의 추상적 표현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유형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문화라는 개념어에 너무나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 아니면 최소한 이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어도,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이는 문화라는 언어의 표현적 특성 때문이다.

1.2. 문화라는 언어의 표현적 특성

언어 발달사적 맥락에서 문화라는 언어의 표현적 특성을 관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는 다의미어성(多意味語性)을 지니고 있고, 둘째, 따라서 문화는 묵계적 사용 정의의 보장도가 낮은 개념어이며, 셋째, 사용자의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그 뜻을 손쉽게 도구화할 가능성이 높은 단어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유가 주로 개념적, 어의적 문제라면, 세 번째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는 앞의 두 문제와 연계되어 있으며, 그 중요도가 그들에 못지 않다.

문화가 다의미어성을 지니게 된 것은 그 언어 변천의 역사 때문이다. 문화의 개념과 그 실용적 사용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좁은 의미의 개념’에서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그리고 다시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개념들이 소멸하지 않고 이후의 개념들과 공존함으로써 각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첫 번째 좁은 의미의 문화 개념은 고전적, 인문학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정신적 성장과 자기 실현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Paideia)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문화개념은 현대의 문화인류학과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로부터 나온 총체성(totality)을 바탕으로 하는 개념으로서 일정한 사회가 생산하고 축적한 모든 것, 더 나아가 일정한 인간 그룹에 관한 ‘모든 것’이란 의미가 강조되었다(이에 관한 이론적 실례를 들기란 어렵지 않다. 문화 개념이 일정 사회의 ‘complex whole’을 대상으로 함을 강조한 타일러(E.B. Tylor)의 말은 이미 인용구의 고전이 되어 버렸다). 이 경우, 총체적 성격의 문화 개념이 유일하고 지배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음으로 해서 얼른 보아 이론적으로는 다의미어성의 문제를 해결한 것 같다(전체는 개별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차피 각기 상이한 부분적 요소들의 집합’, 즉 ‘불완전한 전체’로 전체를 설명하고 표상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또 다른 양상의 다의미어적 문제를 가중시켰다(전체를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각기 다른 불완전한 전체가 난립하므로).

포괄적이고 완전한 인식과 설명을 위한 총체적 개념의 ‘개념적 실수’는 근본적으로 총체성의 의미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해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완전한 인식과 설명을 위한 총체성이란, 인식론적 의도와 인간의 지식취득을 위한 욕구이지, 그 총체적 개념이 현실적으로는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할 수 없음으로, 개념의 내용으로서는 오히려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갖출 수 없는 조건에서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모순적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문화의 주제를 일반화하는데 기여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의 지배적 문화 개념이었고, 문화에 대한 논쟁의 장을 여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재부상하고 있는(그 양상과 성격은 다르지만) 좁은 의미의 문화개념은, 창조행위와 생산행위로서의 문화가 강조된 후기산업사회 지식정보사회의 특징을 대변한다. 따라서 총체적 성격의 문화 개념으로부터 탈피하게 되고, 오히려 인간정신과 창조력의 중요성을 함의하는 고전적 문화 개념을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문화성이 경제성과 연합하는 시대에 문화의 어의적(語義的) 변신뿐만 아니라 권력적 전환을 꾀하게 된다. 바로 이 맥락 위에 ‘문화산업’과 ‘대중문화’의 주제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른바 고급문화 또는 상위문화로 대변되는 첫 번째 좁은 의미의 문화, 즉 고전적 개념의 문화는 정치성과 연관되어 있고, 넓은 의미의 문화, 인류학적 문화는 그 방법론에 있어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적 과학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문화산업과 대중문화로 대변되는 지식정보사회의 문화는 경제성과 결합되어 있다. 즉 문화의 생산과 문화의 소비라는 문제는 점점 더 부각될 것이다. 앞으로의 문화연구에서 이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상의 대화에서 묵계적 사용 정의의 보장도가 낮은 개념이라는 문화의 두 번째 특성 또한 문화의 다의미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이것은 또한 문화란 화두가 담론과 토론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유효한 개념’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소위 상식적 ‘최소 정의’에 대한 협약을 이끌어 내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문화의 개념화 작업은 다양한 이론적 요소를 자신의 개념적 구조 안으로 유도하여 논리적으로 재조합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적 총체성’으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이론적 요구의 종합적 연결점’으로서 문화개념의 역할을 의미한다.

언어 사용의 도구화는 권력관계 형성과 직결된다는 면에서 적지 않은 사회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한 언어의 각기 상이한 뜻은 개념의 혼돈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일정 행위에 대한 의도적 가치부여를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문화의 경우 그 고전적 개념이 아직도 ‘사회적 특전’과 ‘도덕적 위신’을 함의하고 있어서,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조작되고 도구화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문화 개념이 사회 특전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고전적 의미의 문화가 제한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향유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 개념이 내포하는 ‘교양인’이란 의미적 요소 때문에 ‘문화인’은 도덕적이라는 고정 관념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고전적 도덕성과 문화 개념의 연결 고리는 느슨해진 것 같으나, 문화라는 말이 지니는 사회적 가치는 유지되면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문화의 개념은 한편으로 문화라는 단어 사용의 대중화로 그 의미가 가치중립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점점 더 ‘가치 개념’적 성격을 띠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내세우는 ‘문화의 세기’, ‘이제는 문화다’ 등의 구호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문화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문화개념의 문제이다. 물론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가 이야기했듯이 개념은 물체를 단번에 베기 위해서 날을 세우는 연장과 같지 않으며, 니체(F. Nietzsche)의 말처럼, 어의(語義)적으로 현상의 총체적 과정을 모두 조합하려는 개념들은 완전하게 정의되어질 수 없다.

개념은 현실의 이론적 숙소일 뿐이며, 개념의 집은 현실에겐 너무 비좁다. 따라서 한번 지어진 개념의 집에 현실이 머무는 것은 일시적이다. 현실을 새롭게 맞기 위해 개념은 자신의 집을 지속적으로 개조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 앞에 선 개념의 운명적 변모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현실이 영원히 안주할 완벽한 집을 짓는데는 항상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은 다른 개념적 가능성들을 갈구한다. 그리고 한번 설정된 개념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공개하며, 지속적으로 ‘대화의 장소’와 ‘논쟁의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1.3. 서양 현대사상사의 거울

문화 개념의 변화 추이에는 현대 서양사상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문화의 정의와 개념들은 바로 현대 사상의 특성을 대변한다. 물론 시대마다 새로이 부각되는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와 이론화 작업이 있어 왔으며, 이것은 역사의 진행에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이성의 과업이기도 하다.

일정 언어의 역사적 발전 과정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고전적 개념과 새롭게 이론화 된 개념 사이에서, 그리고 전통적 의미와 진보적 의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론적 충돌’과 ‘대조적(對照的) 차이점’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그 같은 변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탐구 태도는 특히 문화와 그것의 개념화 과정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문화의 개념화 과정에는 구체적으로 서양사상의 ‘인식론적 투쟁의 역사‘와 ’인간관 및 세계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충돌, 대조, 투쟁 등의 단어는 ‘이분법적 구조’를 연상하게 한다. 아직도 인간의 사고는 ‘이항대립적’ 인식의 틀을 못 벗어난 것처럼 보이며, 앞서 언급한 사상과 개념의 변화 추이 역시 이러한 틀 속에서의 진행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개념화 과정에서 부각된 명제들의 대립적 구조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절대와 상대, 이상과 실제, 관념과 경험, 일체성과 복수성, 일원화와 다원화, 선별과 개방, 차별과 평등, 중심과 변방, 상위성과 하위성, 귀족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 정신과 물질,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목적과 수단, 인본주의와 과학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적 상황은 단순하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 지속적인 투쟁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그것은 ‘문화’라는 언어 자체가 바로 점령하거나 방어하여야 할 직접적 전투의 장소였기 때문이며, 문화의 주제화를 통해 지적 헤게모니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의 이름’으로 상이한 이념들이 각기 주장되고 이를 위한 이론화와 실천 전략이 세워졌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이러한 경향을 주도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과 이에 연관된 제학문, 특히 문화인류학의 발달이었다. 철학자 바티모(Gianni Vattimo)는 ‘문화인류학의 탄생’을 ‘군중 사회의 등장’ 및 ‘과학적 기초의 위기’와 함께 20세기의 실존주의를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으로 꼽기도 한다. 현대의 문화인류학은 자신의 연구대상을 규정하기 위한, 그리고 과학으로서 자신의 자율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서 문화의 개념화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적 성장 및 자기실현이라는 이상과 가치를 함의하는 고전적 개념을 표상하기 위해 사용된 문화라는 언어를, 초창기 문화인류학자들이 일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취득하고 생산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탈이상적이고 몰가치적 개념을 가리키는 용어로 택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문화의 개념에 복수적, 다차원적, 상대적 요소를 도입한 이 새로운 인간 과학의 특성은 물론 19세기의 다른 근본적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특성이 형성된 것은 중세적 보편주의의 분명한 위기, 민족주의의 급속한 전파, 근‧현대의 지리상 발견의 구체적 여파, 경험주의의 지속적 확산 등과 연관하여 고찰될 수 있으며, 타문화와 접촉을 통해 서구인들의 ‘자기 비판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시기와 맞물려 있다.

또한 인류의 삶의 형태가 복합성을 띄게 된 데에도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실존의 형태에서 매우 복합적인 삶으로의 전이는 현실의 이해를 위한 통합적 지식에 대한 욕구를 낳게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근대적 삶의 모든 복합성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을 찾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학적 또는 과학적 문화 개념의 또 다른 측면들을 보여준다. 첫째 고전적‧인문학적 개념의 주된 관심이 이상(理想)적, 규범적, 목적론적인데 비해, 인류학적 개념은 본질적으로 ‘지식(知識) 추구적’이다. 둘째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1.2.) 총체적 성격의 개념이다. 이는 방법론적으로 총체적 접근이라는 단순 사고이든, 문화현상 이해의 전제(前提) 이념으로서 총체성이든, 상이한 요소들의 인식적 가치를 각각 인정함과 동시에 접합하고자 하는 의도의 표시인 것이다.

따라서 서양사상사의 맥락에서 보면, 문화의 이념은, 19세기 중반부터, ‘인간관과 세계관 형성의 근본적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의미성(多意味性)을 포함한 문화 개념의 제 문제는 분화된 각 학문이 나름대로 통합적 지식을 추구하는 발전 양상 및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역사적 특성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이론화 작업을 위한 언어 차용의 관점에서 볼 때에, 문화 개념의 역사는,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이념을 품고 있는 이론의 발전사이다. 다시 말해, 이런 전환기에 이루어진 문화의 개념은, 이미 일정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았지만, 새로운 ‘이론적 입장’과 ‘지식의 창출’을 위한 이른바 ‘과학적 구성’의 개념임을 주장한다. 물론 ‘입장의 주장’을 위한 ‘언어의 차용’은 단순히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이론화 작업을 위해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의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문화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이념적, 방법론적 전투의 결과는 그 어느 쪽에도 결정적 승리를 안겨 주지 못했다. 따라서 문화라는 한 단어를 통해 나온 상이한 이념적 의도(意圖)의 두 목소리는 현실에서 그 단어 사용의 이분화를 초래했다. 이것은 오늘날 일상적 사용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인류학적‧과학적 개념의 문화는, 자신의 본질적 총체성으로 인해, 다른 형용사적 접두어에 의해서 구분성과 영역을 획득하는 명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정치문화, 정신문화, 물질문화, 군대문화, 예술문화, 출판문화, 고급문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외형상 일정 ‘분야’에 의해서 한계가 지워지는 수동적 의미어가 되어 고유의 의미를 상실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 고전적‧인문학적 개념의 문화는 고유의 가치 개념적 성격을 유지하여 일정 명사에 가치론적, 목적론적 의도를 부여하는 형용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문화유산, 문화수준, 문화정책, 문화교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 명사에 능동적 ‘의미부여’를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적 구분은 일차적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주변상황의 변화 추이를 정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식론적 기준과 세계관 형성을 위한 ‘인간 사고의 역정’을 동반자적 자세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뿌리깊은 곳까지의 관찰이 요구된다. 이러한 관점은 문화의 개념과 존재론적,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여타 개념들을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 그 대표적 개념이 사회이다. 다시 말해, 문화와 사회의 개념적 구분성과 연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문화의 세기’에 맞는 ‘관계의 위기’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이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유난하다. 우리는 새 세기를 맞이하기 전인 20세기 말부터,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구호처럼 외쳐댔다. 그런데 문화의 세기가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 무엇인가? 아니면 문화의 세기의 도래와 함께 우리 삶에서 변해 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문화의 세기와 함께 온 것은 ‘관계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즉 사람 사이의 관계에 다양한 위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성과가 부상하면서 사회적 관계에 급격하고 다양한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와 사회가 조화로운 공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한 갈등의 상황에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인터넷 문화의 확산은 부부 관계, 세대간의 관계, 부자와 빈자의 관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 등에 위기를 가져 왔고 우리는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는 당연히 문화와 사회의 개념과 그 현실적 의미에 대한 재조명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사람들이 이론적이라고 외면하기 쉬운 개념 천착의 실용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도 하는 사회와 문화라는 말의 개념 형성 과정에서 인간관과 세계관 변화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날 ‘문화의 세기에 맞는 관계의 위기’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과제다.

2.1. 인간은 사회적 동물?

우리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현대적 이성의 그 못 말리는 의구심과 해체 작업으로 진리라는 신화는 더 이상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대에도 이 말은 ‘진리’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조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것도 이제는 상식 수준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말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했을까?

그가 자신의 정치학과 윤리학 저서에서 인간을 수식하기 위해 쓰는 말은 주로 ‘폴리티콘(politikon)’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본성은 ‘폴리티콘 조온’(politikon zoon)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폴리스를 구성하며 폴리스에서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폴리스는 본질적으로 정치공동체이고, ‘폴리티콘 조온’을 직역하면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만이 자족(自足)의 능력이 있고, 각 개인은 물론 그 이하의 공동체, 예를 들어 마을이나 가족은 그 자체로 자족의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이런 소규모 공동체나 각 개인은 도시-국가 폴리스의 일원으로서 그에 참여할 때, 비로소 자족의 수준에 이를 수 있고 그것은 바로 행복의 조건으로 이어진다. 이는 공동체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갖는 정치 권력의 실체가 일상 생활에 침투하는 정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공동체에서는 오늘날 민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상당수 형법적 해결의 대상이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덕(德)을 논할 때도 그 덕은 주로 폴리스의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공인으로서 덕을 의미한다(이는 동양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유가에서 덕은 상당수 군자의 덕이고 군자는 공인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사상 역시 사회철학이라기보다 정치철학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인들에게는 다수 공동체로서 폴리스에서 정치성과 사회성은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현대인이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에는 정치의 영역에 흡수되어 있었다. 폴리스의 사람들에게는 ‘정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개인이나 가족 또는 마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개인은 우선적으로 자신과 폴리스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영어를 비롯한 현대 서구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에서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라는 표현들을 발견하는 것은 한편으론 번역 관습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으론 개념 적용의 문제이다. 물론 개념이 형법적인 것이 아닌 이상 ‘개념 불소급의 원칙’은 없다. 오히려 개념은 상당수 소급 적용의 원칙(?)을 따른다. 하지만 어떤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서 어디에 소급 적용되었는지를 아는 것과 그 적용의 정당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여기서 주지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회의 개념은 18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대와 중세사를 사회라는 화두로 조명하는 것은 차후에 형성된 개념의 소급적 적용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그 적용의 정당성은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이른바 ‘사회 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인간관계가 국가 개념에 의존하는 것에서 분리돼 인식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구체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만(Niklas Luhmann) 등의 사회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사회적 실존을 나타내는 공동체적 삶(koinonia)이 사회적 관계의 한 영역인 정치 공동체(koinonia politike)를 의미하는 고대의 전통은 이어져 왔고, 그것이 존재론적 윤리학적 우선권과 가치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사회적 성격에 대한 관찰과 이해는 정치 이론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인간 공동체의 의미가 기능, 구조, 과정, 정보, 행위 코드, 복합성 등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주로 공적 대인 관계, 법률, 제도 등의 개념으로 조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율적 영역의 현실’로서 사회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실재(實在) 자체에 대한 굳은 신념에 의해서 가능했다(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니? 지금의 우리로서는 우스울 정도의 일이겠지만, 서구에서 불과 250여 년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천착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사회이론의 실질적 발전을 위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회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한 터전을 제공한 제일 조건은 산업혁명의 강한 영향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국가에 대해 상당한 자율권을 가진 영역으로서 사회(구체적으로 Civil Society)의 개념이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시빌 소사이어티로서의 사회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국가와 구별되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의 총체적 영역에서 시민계급의 혁신적 정신을 표상하게 되었다. 이는 산업혁명의 영향과 시민계급의 부상이 ‘인간 관계에 개입하는 물질적 조건’을 새로이 형성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가 사회의 의미 있는 본질적 구조로 자리잡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적 사회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면서 지난 2세기 동안 ‘사회’라는 말은, 인간 현상에 관한 이론화 작업에서 현상 전체를 겨냥하는 개념이자 각 연구 분야의 지배적 개념이었다. 이것은 인식론적 관점에서도 지식의 근본적 비판은 사회이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 -단순히 물질적 생산의 증가 현상을 넘어서- 사회를 ‘인간 관계에 개입하는 물질적 조건’이라는 맥락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또한 사회 관찰에 있어서 법적 특성을 내포하는 정치적 요소가 약해지는 반면, 경제적 특성을 내포하는 문화적 요소가 강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인간이 정치적 동물에서 사회적 동물로 새로이 부상함과 동시에 문화적 동물로 각별히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물질론을 바탕으로 한 문화 의식, 산업으로서 문화, 대중 전달과 소비로서 문화는 이 때부터 싹튼 것이다.

통시적 안목으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는 ‘문화의 세기’의 시작은 18세기 후반에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서구에서는 -문화를 지속적으로 중요시 여기지만- 문화의 세기를 구호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유난히 구호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 역사 인식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2.2. 사회와 문화

문화의 개념은 문화인류학 용어로 정착하던 초기부터 사회의 개념 못지 않게 인간의 삶을 총체적 이념으로 묘사하고 분석하려 했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 들으면 이상하겠지만, 오늘날 문화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프랑스 학계의 일부에서는 불과 20세기 초까지 사회의 개념과 혼동된다는 이유로 문화라는 말의 술어적 사용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연관하여 인식될 수 있는 문화의 개념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문화라는 요소가 사회에 비해 인간의 속성을 더 잘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 외의 동물, 곧 벌이나 개미, 철새 떼, 늑대 무리 등 여러 동물 집단에서도 사회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지만(물론 여기서도 동물의 군집성과 인간의 사회성은 구별되지만), 문화적 성과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입장에서 우리는 사회로부터 구분되는 문화 개념의 기준이 ‘생산’을 비롯한 창조행위와 그 ‘성과’ 및 그것을 ‘즐김’에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산 활동과 연관이 있다. 쉽게 말해, 사람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과 연관이 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은 바로 사람의 삶에 개입한다. 따라서 인간의 생산물(창조물이라고 해도 좋다)과 그 생산물의 영향이 특히 오늘날 문화라는 말이 갖는 본질적 의미다. 우리가 오늘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인류학에서 인간 삶 전체와 동일시하는 총체적 의미의 문화 개념과도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고급 예술과 밀착된 고전적 문화의 편협한 개념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물론 고전적 개념도 창조 및 생산의 의미와 분리될 수 없다).

18세기 말의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생산물은 그 이전의 시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두면서 증가해 왔다. 그리고 이른바 후기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생산물은 양적으로 급증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하드웨어의 생산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창조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물과 함께 인간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의 문화적 삶을 살고 있다. 자동차와 비행기로 관광 여행을 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인터넷을 이용하고 이동전화로 대화를 한다. 그뿐 아니라 극장에서 영화와 뮤지컬을 보고 VTR이나 DVD플레이어로 다시 보며, 오디오 시스템으로 고전 음악을 듣고, 캐릭터와 콘텐츠라는 말이 친근해지는 등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이러한 의미의 문화적 삶은 대중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일상화되고 있다. 즉 문화산업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면서 고전적 문화의 대중화와 일상화를 포함하는 것이 오늘날 문화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오늘날 문화라는 유행어 때문에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역할과 의미다. 사회는 ‘관계’를 그 본질로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 말이다. 가정이라는 기초 단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부 사이의 관계와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를 비롯해, 좀 더 큰 인간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회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개념 형성의 역사와 논리적 구조로 보아, 사회의 개념은 ‘관계’의 요소를 본질로 하며, 문화의 개념은 ‘실현’의 요소를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생산의 맥락에서 보아도 사회의 개념을 통해서는 생산행위가 이루어 질 때에 생산주체 사이의 관계를 주로 관찰하려 하고, 문화의 개념을 통해서는 생산이라는 실현 과정을 주로 분석하려 한다. 이것은 서양어의 라틴어 어원에서 문화는 ‘경작(cultura)’이라는 뜻에서, 사회는 ‘동료(socius)’라는 뜻에서 유래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회라는 말로는 사람 사이의 관계, 체제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체제 사이의 관계를, 문화라는 말로는 생산을 포함하는 인간의 실현능력과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주로 의미한다.

그런데 사회와 문화, 즉 관계와 실현이라는 두 명제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매개(媒介)의 개념이다. 이것은 또한 현실적으로도 오늘날 사람 사이 및 인간집단의 관계는 문화적 실현 행위에 따른 성과물에 의해 끊임없이 매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문화 활동 자체가 인간 관계를 끊임없이 매개한다.

쉽게 말해, 문화 생산물은 인간 관계에 개입한다. 생산과 그 생산의 성과물로서 현대문화는 사람 사이의 사회 관계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나 인터넷처럼 물질적 성과를 그 기본으로 하든, 아니면 대중음악과 각종 퍼포먼스같이 예술적 성과를 기본으로 하든 문화적 실현은 사회 관계에 개입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사회 관계는 문화적 성과에 의해서 끊임없이 간섭받고 매개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동물의 군집성과 인간의 사회성을 구분해주는 것도 문화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매즐리시(Bruce Mazlish)는 인간이 군집성 동물들과 다른 사회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인간은 생물학적 유전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전도 가지며, 더 나아가 인간의 진화는 물리적이지 않고 문화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런 사회 문화적 진화의 특성을 자손의 번식을 통제하는 수단과 방식에서도 관찰한다. 다른 동물들도 새끼 살해 등의 수단으로 출생을 조절하여 개체 수를 통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만이 관습을 통해 출산을 조절하며, 낙태 기술과 문화적으로 발달시킨 여러 가지 피임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특유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문화적 질문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문화가 사회에 개입하는 구체적 예는 사회과학자들의 주된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포스트먼(Neil Postman)은 “서구에서 비생물학적 정보관리를 위한 제도로서의 가족은 인쇄술의 부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쇄술의 발달과 도서의 보급 확산과 함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한 책을 구해 볼 수 있게 되면서, 부모는 보호자, 후원자, 양육자 그리고 취향과 바른 판단을 유도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는 것이다. 즉 부모의 기능은 가족을 허물 위험이 있는 정보들을 가족의 영역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아이가 의당 어떠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포스트먼의 주장은 자신의 관점이 인터넷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물론 실현으로서 문화가 관계로서 사회에 개입‧간섭‧자극‧방해하는 매개 현상은 관계를 맺어주는 매개일 수도 있고 관계를 파괴하는 매개일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 보면 -이미 18세기에 칸트(I. Kant)가 간파하였듯이- 문화의 성과물은 사회성을 향상시키는 조건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적 판단이다. 인간 정신과 기술의 실현성이 고도에 이른 시대에는(지금보다 더 발달한 정보‧지식‧멀티미디어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지만) 문화적 활동의 결과는 매우 복합적일 것이고 관계를 매개하는 방식도 극도로 다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문화 연구에서 ‘관계에 대한 실현의 매개가 어떻게 최적의 성과를 얻는가’라는 것은 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문화적 입장에서의 성찰’과 ‘문화에 대한 사회적 입장에서의 성찰’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3. 시대와 위기

시간 숭배는 또한 시대 숭배를 가져오는데, 우리가 문화의 세기라고 할 때 우리는 한 시대를 단순히 특징짓거나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상징화한다. 바르트(Rolan Barthes) 같은 학자라면, 사람들이 그 상징성을 당연시하기 시작하면서 또 하나의 ‘현대의 신화’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얼마 전 어떤 대학 교수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필자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몇 년 전부터 문화의 세기라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문화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무슨 특별히 좋은 뜻이 있을까요? 그것이 정보지식사회의 발전과 연관이 있습니까? 문화로 돈 벌자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문화적이 되자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계속 물어댔다. 그는 지성인답게 범인들의 당연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질문을 잘 보면 어떤 형태로든 문화의 세기가 긍정적 가치일 것이라는 것이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특별히 좋은 뜻’, ‘정보지식사회의 발전’, ‘문화로 돈 벌기’(일종의 문화국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되기’(이건 고전적 문화 개념의 잔재다) 등 그리 부정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는 그 긍정의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답답한 것이다.

시대의 당연성은 그 의미와 특징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의구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넘어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문화의 세기라는 말을 할 때에,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말인데 안 그렇겠는가. 그런데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인터넷 중독에 의한 가정 불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휴대전화 사용 때문에 공공 장소에서 일어나는 시민들 사이의 갈등,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의 급속한 전이로 인한 문화 향유 방식의 불균형 등이 특히 우리나라에서 문화의 세기와 밀접하다는 것은 얼른 생각하지 못한다.

반면 어떤 표현에 문화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그것이 문화의 세기라는 우리 시대의 특징과 연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예를 들어서, ‘일본 문화 수입’이라든가, ‘문화 상품 개발’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이른바 ‘해리 포터 신드롬’이 문화의 세기와 밀접하다고는 바로 생각하지 못한다.

영국 작가 롤링(Joan K. Rawling)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도서‧영상 양 분야에 걸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에 각종 캐릭터 상품과 게임 상품으로 연계되는 것까지 합하면 그 문화적 성공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그 작품의 환상성 때문에 어른들조차도 현실도피 심리가 발동될 수 있고, 현실감이 결여된 아이들의 균형적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지나친 우려일지도 모른다. 해리 포터 책을 읽은 남편이 갑자기 아내에게 아이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나. 아니면 마법의 학교를 찾아 가출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일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 책을 사주고(그것도 시리즈니 계속 사주어야 한다) 영화 예매를 하고 캐릭터 상품을 사주기 위해 별도의 가계 지출을 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부부끼리 아니면 부모와 아이들이 다투는 경우도 자주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화적 ‘사건’들은 항상 관계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 생산물의 증가와 문화 교류는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기던 사회 관계가 문화적 매개로 인해 위기를 맞는 사태를 가져온다. 이에 더해서 우리나라에서 최근 몇 년간 ‘문화추종적 경향’은 ‘사회 관계에 대한 관심’조차 약화시켰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사회적 관계는 아직 전통적 틀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문화적 생산물은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라 주로 남의 나라에서 창조 발전된 것을 수입하는 입장에서 그 위기의 강도는 강하게 느껴진다. 그 가운데서도 각 세대간 괴리 현상과 빈자와 부자 사이의 문화 향유 불균형은 ‘관계의 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물론 문화적 매개에 의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부정적인 만큼 긍정적 모습도 많이 갖는다. 하지만 문화의 세기라는 말은 그 긍정적 대표성 때문에 부정적인 모습들을 감추기 쉽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기존의 인간 관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관계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람 사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위기가 온 것이다. 문화의 세기에 맞는 관계의 위기, 즉 문화력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성의 위기가 현재 우리의 위기인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새로운 성취를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 이런 지혜가 우리의 미래를 좀 더 평안하게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http://blog.naver.com/verthandi/8001581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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