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를 가기 위해서는 과테말라를 들러야만 한다. 여건상 과테말라를 체류하기에는 여러가지가 힘이 들것이라 여겼었는데, 프랑스 에스페란티스토인 Philippe가 과테말라 파나하첼(Panajachel)의 아티틀란 호수(Lago Atitlan) 위에 자신이 지은 집이 있다고 여행 중 지나가면 언제든지 사용하라고해서 즐겁게 머물기로 했다. .
체 게바라가 혁명이 끝나면 가장 살고 싶어 했다는 아티틀란 호수를 꼭 보고 싶은 바람도 갖고 있었지만 그동안 중미 여행을 하면서 니카라과 호수와 코스타리카의 아레날 호수의 아름다음에 흠뻑 취한 나로서는 이티틀란 호수는 타 호수들과의 비교 대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라나다에서 이른 새벽 자전거로 달리면서 본 니카라과 호수는 거대한 바다 같은 웅장함 속에서 풍겨 나오는 신선한 에너지였다면 코스타리카의 아레날에서 리베리아를 가는 차장 밖의 아레날 호수의 끝없는 정경은 “호수와 그것을 둘러싼 마을과 풍경들이 포근한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과연 아티틀란 호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보여 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우선 파나하첼을 가기 위해 유네스코가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안티구와 (Antigua)에서 이틀을 쉬면서 구경하였다.

중남미 도시의 아름다음은 스페인 여행 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스페인풍의 도시의 발견 이었다. 중미의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 문명들은 거의 폐허로 변했거나 아니면 도시로서의 기능이 아닌 유적으로 격리된 곳 이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 하나의 유적이며 역사이다. 하지만 스페인 유적의 잔재물들은 700년 간의 스페인 식민지 삶들과 애환의 역사가 녹아들어 그 도시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루의 쿠스코나 에콰도르의 쿠엥카 역시 과거 스페인 건축물들이 그 도시의 랜드 마크로서 자리잡고 있으며, 과테말라의 안티구와 역시 아기자기한 목조, 석조 스페인 풍의 건축물들이 많아서 이 도시를 찾는 여행객들을 과거로 즐겁게 데려다 준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이슬람 정원과 석회 등을 이용한 벽 장식을 만날 수 있었고, 살라망카에서 본 바로코 석조 건축물들은 안티구아 도시의 일반 주택과 이글레시아(성당)를 아름답게 변모 시켰다. 또한 도시를 처음 찾는 이방인들을 위해 만든 것 같은 도심의 중앙 광장인 플라자 마요르는 한 눈에 그 도시를 스페인 풍으로 친근하게 만든다.

주소 Panajachel 에서 Godinez 방향으로 104 km.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Philippe가 알려준 전부이다. 덧붙여 찾기 쉽다는 것이고, 가면 Pedro 라는 인디오 할배가 있으니 그에게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황당한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는 것도 웃기지만 우선 그 집이 궁금했다. 그가 보내온 내용은 그의 집이 푹 쉬어가기에는 딱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안티구와에서 버스로 3시간 걸려 파나하첼에 도착하였다.

한 눈에 아티틀란 호수가 들어온다. 다시 마을버스를 기다려 기사한테 주소를 보여주니 무조건 타라고 한다. 20분쯤 갔을까 여기라고 중간에 내리라고 한다. 마을과 집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도로 가에서 내려서 보니, 밑에 보이는 것은 아티틀란 호수 뿐, 온통 산으로 둘러싼 호수의 정경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통 물어볼 사람도 없고 배낭을 매고 어디로 가야 집을 찾을 수 있을까 한참을 왔다 갔다 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경찰차가 있어 주소를 물어보니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Organic Mielo라는 팻말이 그 집이라는 것이다. 그 주소는 그 집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이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거짓말 같이 집 한 채가, 그것도 무슨 집이 배 모양으로 만든 의아스럽게 생긴 집이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다. 저게 정녕 집이란 말인가 할 정도로 비록 오래 되었지만 제법 운치있게 지어진 집이 호수를 바라보며 있는 것 아닌가?

Hola를 연신 외치자 나이는 들었지만 마음씨 좋게 생긴 페드로 할배가 나왔다. 짧은 스페인어로 한국에서 온 펠리페 친구라고 하자, 잘 왔다고 방으로 안내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페드로 할배 역시 스페인어가 서툴다. 과거 스페인 식민지가 끝나고도 성경을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어로 가르치려고 하자 국민의 60%가 각 지방의 인디오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실패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있지만, 추투힐(Tzutuhile)이라고 불리는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여자들의 경우 전통 복장인 화려한 블라우스 위필(huiple)과 머리 주변에는 손으로 짠 천을 두르며 남자들은 카우보이 모자를 쓴다.
갑판 밑으로는 방들이, 위로는 호수가 훤히 보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문명과 동떨어져 살기 위해, 그리고 과테말라 산악의 토종 꿀을 채취하기 위해 이 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들도 없고 마을도 없는 이 곳에서 난 아침 햇살을 받은 호수가 다이아몬드 불빛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음에 흠뻑 취했다. 또 저녁에는 화산 너머로 지는 석양이 호수에 반사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 보았다. 호수가 한 폭의 동양화 같고, 하나의 서정시처럼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전기가 필요 할 때는 발전기를 돌려 충전하지만 평소에는 전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둠이 찾아오는 7시부터 잠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왜 이리도 밤이 긴지 여기 와서 알게 되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도통 시간을 알 수 없는 어둠 뿐이다. 새벽이 되어서야 서서히 밝아오는 호수를 보며 아침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침 해가 올라오기 전 하얀 뭉게 구름처럼 피어나는 물안개 낀 호수는 페루의 마추피추에서 바라보는 산 안개와는 또 다른 신비감이다.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지역은 중미의 다른 곳 보다 선선하다. 땅은 척박하지만 강렬한 태양을 피할 수 있고 호수에서 나오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단백질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원주민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 온 곳 이다. 어쩌면 문명의 범람을 피해 더 사람들의 발길이 어려운 곳으로 이주해 왔을지도 모른다.
산을 넘고 호수를 건너, 파나마의 산블라스 군도를 여행 할 때에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오지 섬에 집 한 채 짓고 힘들게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디오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끼를 먹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 보관이 어렵기 때문에 욕심 낼 필요 없이 그 날 식구들 먹을 만큼만 잡으면 된다. 거기에 텃밭에서 어렵게 자란 채소 조금과.

여기서도 나 역시 하루 종일 먹을 것을 걱정하게 되었다. 페드로 할배가 따다 준 아보카도와 또르티야 전병이 그 날 하루의 식사이다. 내가 하는 일은 화덕에다 커피를 끓이는 일이다. 가까운곳에 뭐 파는데도 없기에 조금 남은 비상식량 (건과류)을 아껴서 먹었다. 하루 종일 호수를 바라보며 페드로 할배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심심하면 내일쯤 파나하첼이나 고디네스에 가라고 한다. 걸어서 파나하첼은 2시간, 고디네스는 1시간 가야 한다. 호수를 끼고 걷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더니 웃으며 그러자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디네스를 갔다. 그래도 마을인지라 사람들도 북적인다. 채소랑 산에서 난 과일, 곡물류도 파는 작은 장도 있고.. 식품점도 있다. 산 속과 호수에 사는 인디오들이 이런 마을을 중심으로 만나고 물건을 팔고 있는 것 같다. 이동할 수 있는 운송수단도 눈에 많이 띤다.
나는 Philippe 집에서 4박 5일을 머물렀다. 그 시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도 없는 산 속 선박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호수만 바라보며 지냈다. 아트틀란 호수를 떠나면서 머리 속에 박혀있는 호수의 수채화 같은 그림들을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