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과 '특집' 좋아하는 사회 [퍼온글]

문화관련 글들(ktp) 2007/03/14 02:07
파문놀이로 함께 해요

“오늘 00당 XXX의원이 (당신이 지겹게 뉴스를 통해 본 내용들을 스스로 나열해보라)란 말을 하여 정계에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파문. ‘ㅍ’이 갖고 있는 거센 소리의 임팩트로 인해 당신은 가슴 속에 약간의 공포심을 갖게 된다. 눈은 자연스럽게 커지고, 고개를 브라운관으로 내민다. 오늘은 무슨 자극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떠한 일의 영향’이라는 생각보다 ‘싱거운(?) 명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파문’이란 단어는 액션 영화에 분출되는 스펙터클,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면 느끼는 쾌감으로 전환되어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한다. 뉴스는 정작 사건의 본질을 합리적으로 소개하는 것을 잊은 채, ‘말’에 담긴 ‘격정’만을 채집한다. 이런 사례들의 빈번함을 볼 때면, <영화, 그 비밀의 언어>의 저자인 장 끌로드 까리에르가 했던 말은 유효하다.
“뉴스는 오락이다.”

얼마나 ‘파문’의 메커니즘이 지겹도록 설파되었는지, 누리꾼들은 ‘파문놀이’라는 것을 만들어 덧글과 덧글의 유머러스한 교환으로 서로의 웃음보를 자극하려 애쓴다. ‘윤은혜, 독일월드컵이 왜 새벽에 중계되는지 몰랐다 파문’, ‘지하철 결혼식, 알고보니 자작극이었다 파문’. 이제 뉴스에서 ‘파문’이란 용어가 나오면 별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뉴스는 자신만의 ‘파문놀이’를 수행한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파문이란 단어가 나오면 이젠 들어왔던 습성이 생겨, 예전보다 쉽게 자극을 걸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파문’이란 단어가 난무하면서 정작 걱정되는 것은 일의 경중이 사라지고, 가치의 옳고 그름마저 본질과 합리가 아닌 이미지와 정서의 잣대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 매주가 특집인 <무한도전>의 특집남발증 -


* 특집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 매달 14일이 되면 설레임이 밀려오는가. 홈플러스엔 14일이 되면 ‘얼씨구나’ 장단 하에 2월엔 초콜렛이, 3월엔 사탕이 그리고 11월엔 빼빼로가 ‘알록달록’, ‘요리조리’ 배치된다.
나의 아련했던 연애사가 생각난다. 5월 14일, 장미꽃 한 송이도 안 챙겨준다며, 이 특별한 날에 나를 가여운 여인으로 만든 자네는 과연 로맨틱한 남자인가라고 심문하는 그녀에게 ‘끽’ 소리도 못하고, 인사동 거리를 죄인처럼 걸었던 그 날. 물론 나의 무지가 그녀의 가슴을 심란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은장도로 나의 무릎을 찔러도 무방한 일이나, 14일의 이벤트가 난무하는 이 사회에 어찌 원망을 표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은 무슨 프로그램을 볼까. 편성표를 확인해보니, 무슨 ‘특집’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 어렸을 때 나에게 텔레비전의 ‘특집’은 명절과 예수 그리고 부처의 탄생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심심하면 찾아오는 것은 울릉도 호박엿이 아니라, 특집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나를 웃겨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개그- 내가 잘 보는 <무한도전> -를 보면 나를 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그에 내 발을 담그기 전에, 아쉬움이 섞인 ‘딴지’의 가능성은 강력하게 존재한다. 굳이 붙일 필요가 없는 ‘농촌특집’, ‘복고특집’ㆍㆍㆍ특집이란 단어를 왜 이리 남발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방송에서 ‘특집’이라는 테마가 명시된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이제는 사라졌다. 마봉춘(MBC)도, 크브스(KBS)도, 스브스(SBS)도 심심하면 ‘특집’을 갖다 붙인다. 이제 ‘특집’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기대는 사라지고, 특집에 담긴 효과는 ‘특집’이란 글자에 표현된 ‘의사-기대감’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연인들은 14일만 되면 ‘무슨데이’라는 특집에 스트레스를 받고, 방송에선 심심찮게 ‘특집방송’을 한다고 설치니,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특집공화국이다.

* 감동 강요하는 사회

“.. 한국에 돌아와서 유난히 자주 듣는 말이 ‘감동’이다. 감동이란 결국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사람을 움직이려면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논리적 설득보다 정서적 감동이 종종 더 큰 역할을 한다. (중략) 굳이 연속극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초기에는 TV를 보면 자주 눈물을 흘렸다. 조금 슬픈 장면에는 영락없이 구슬픈 배경음악이 깔린다. 최근에는 뉴스 보도에조차 배경음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본다. 정념이 풍부한 사람들은 감동을 좋아하는 법이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중에서-

혁준이와 신식이가 길을 가다가, 콜라병 몸매의 여인을 발견한다. 신식은 혁준에게 이런 감탄사를 날릴 것이다.

“야! 저 여자 죽이지 않냐?”

좋으면 좋은 것이지, 죽일 필요까지 있으랴. 자동차 사고가 나면 남보다 강하게 성낸 놈이 승자인 사회, 자신과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 대화보다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돌발영상’의 이미지에 씁쓸한 웃음을 짓는 사회. 대한민국의 비공식 18번 ‘한 오백년’을 생각한다면, 억압과 분출의 피드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이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의 격분이 때론 합리적 과정을 무시하고, 인맥자본으로 돌변하여 낙하산 인사를 만들고, 극장에서 나를 단시간에 웃기거나 울리지 않으면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쓰레기 영화’라고 치부 받는 이 사회에 과연 정념과 감동은 원활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 감동의 결핍인가, 감동의 과잉인가. 자작극으로 밝혀진 지하철 결혼식 -


2006년 2월 10일, 지하철 5호선 우장산 역을 지나는 전동차에서 두 남녀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시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조촐한 결혼식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강렬한 효과로 남았다. 심지어 당시 지하철에 있던 할머니 한 분은 그들의 삶을 축복하고 위로하며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이 결혼식이 연극영화과 출신 대학생들이 두 달동안 준비해온 '연극'이란 소식이 공개되면서 한편으론 씁쓸한 소회를 감출 수 없었다. 일 년이 지난 후, 인터넷을 통해 ‘진범을 잡아라!’라는 특명이 내려졌던 여학생 성추행 사건도 결국 여학생들의 조작극으로 밝혀졌다. 여학생들은 UCC를 통한 뉴 미디어 기업들의 상업적 부정성들을 알리고자 동영상을 제작했다고 하지만, 속으로 ‘월척이다!’라고 외쳤을 지상파 방송사의 보도국이나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는 하나, 진의와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의 어긋남을 보인 여학생들에게 가지는 씁쓸함은 가슴에 깊이 남는다.



- 진의는 좋았지만, 표출과 표현의 심사숙고가 고려되지 않은 일년만에
다시 일어난 제2의 지하철 결혼식, 여학생 성추행 연출 사건 -


갑자기 부는 UCC 열풍엔 오직 ‘감정의 분출’ 뿐이다. 미디어의 수많은 기능 중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지위부여기능’의 유혹에 어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감정에 호소하고, 자극에 호소하며 벌이는 ‘관심받기 놀이’의 심리가 미디어의 지위부여기능이 가져다주는 ‘스타 만들기’와 ‘자기 주목의 과잉’에 국한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조작을 진실처럼 받아들이고 오늘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적실 것이다.


결국 ‘감동’으로 점철된 연극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지상파 방송사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방송을 조작하는 일이 일어난다. 더욱 괘씸한 것은 ‘사과방송’ 한 번으로 무마해버리려는 속성이다. 미디어는 감동이란 좋은 어감 아래, 하인즈 워드와 위성미를 아무렇지 않게 갖다 쓰며, 황우석과 MBC 사이에서 스릴있는 게임을 즐겼다. 파문놀이, 특집놀이, 감동놀이.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 ‘놀이’ 참 많다. 다음에 태어날 내 자식에게 다음엔 무슨 놀이를 가르쳐줄까.
                                                                               - 출처 : 풀로엮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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