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번째 마당- 무한 도전의 나라 브라질 (산 카를로스, 플로리아노폴리스 편, 12/13- 12/20)

전생이 아무래도 알뜰살뜰한 주부라고 생각이 드는 산 카를로스의 에스페란티스토 파파고(Papago)와의 만남은 무더운 여름에 만나는 한 줄기 소나기 같은 상쾌함이었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교사 출신의 아내와 연로하신 장모님 대신 아침 일찍 일어나 조반을 준비하고 식탁을 장식하는 뒷모습의 그를 보면 영락없이 부지런한 여인네 형상이다. 매일 아침 강아지 칠리 산책 시키고, 신선한 빵을 사기위해 줄서서 기다리고, 저녁에는 슈퍼에 들러 동네 아줌마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파파고는 누가 뭐라 하든 아내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애처가이다.

전국 최대 은행 브라질 은행원으로 은퇴한 파파고는 매주 월요일 자신의 쾌적한 집에서 에스페란토 강습회와 교회에서 가난한 이웃을 위한 자선봉사도 놓치지 않는 멋쟁이이다. 눈처럼 하얀 머리 곱게 뒤로 빗어 넘기고 분홍색의 곱디고운 티셔츠와 흰색의 바지는 그의 여성적인 성품을 더욱 화사하게 북돋아 준다. 그의 딸 라리사가 근무하는 산 카를로스 연방 대학 옆에 위치한 생태공원에서 만난 신기한 동물과 새들과 나무들은 브라질이 얼마나 풍성한 대 자연의 식구들을 거느리고 있는 나라인지 느끼게 해주며 그곳에 서 있기만 하여도 향긋한 삼림 냄새로 하루 종일 기분을 맑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브라질 연방, 주립, 국립 대학들은 학생들의 등록금은 물론이요 기숙사비까지 무료라고 하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런 어마 어마한 사실은 비싼 학자금에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의 허리마저 휘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천정부지 대학 등록금과 비교해보면서 부러움에 몸서리를 친다. 아직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과 GNP상 비교가 안 되는 브라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정치가 올바르면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알게 해준다. 2010년 12월 31일로 퇴임하는 브라질 최고의 스타 룰라 대통령이 12월 23일 대국민 고별 방송을 하였다. 현재 지지율 87%, 그러나 박수 칠 때 떠나는 아름다운 대통령 룰라는 '나 에게 이미 멋진 현재를 국민 여러분이 주셨으니 나의 미래는 묻지 마시고, 대신 브라질의 미래를 봐 달라고' 연설을 하여 브라질 국민들로부터 또 한번의 극진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브라질 역사상 카르도주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재선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은 중남미 좌파의 대명사로 미국의 뒷마당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한 자립과 실용주의 경제 노선을 추구하면서 빈부격차 해소에 많은 노력을 과감하게 진행시켜 왔다. 무료 공중 보건실시, 무상의무교육 등등... 역시 윗물이 맑으면 저절로 아랫물도 맑아진다는 사실!!

12월 12일 저녁 10시 30분 플로리아노폴리스(Florianopolis)행 버스가 출발도 하기 전부터 말썽이다. 상파울로에서 10시간 걸린다는 장시간 거리를 이미 두 시간을 터미널에서 발 동동 구르며 허비 했으니 내일 도대체 몇 시에 플로리아노폴리스에 도착할지 궁금하다. 버스만 탔다하면 취침 모드에 들어가는 배! 째라 부부의 꿈결 따라 어느덧 차창 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아니 벌써 오전 11시, 혹시나 우리 부부를 애타게 기다리다 지쳐 에스페란티스토 실비오마테스(Silviomates)가 그냥 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채 끝내기 전에 그가 인사를 건넨다.

인구 40만의 플로리아노폴리스는 사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이다. 그는 거창한 구경거리를 보러 오기 보다는 브라질 보통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와서 놀면서 쉬면서 함께 지내자고 한다.

국제무역을 전공한 실비오마테스는 20년 동안 일만 하다가 2009년 처음으로 아내 데바(Deva)와 자동차로 70만km 유럽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자동차 여행의 짜릿함과 고단함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낀다며 오늘 하루는 무조건 푹 쉬라고 권한다. 세상모르고 자는 동안 데바는 우리의 옷 가지들을 다 빨아주고 바짝 마른 후에는 가지런히 포개서 단정히 우리 침대로 가져다주는 수고도 마다 않았다.
유럽의 전체 면적보다도 더 큰 브라질(8,514,215km²)은 동남부에 위치한 산타 카타리나(Santa Catarina)주의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 북부 지역 까지는 버스로 4박 5일이 걸리는 어마 어마한 면적의 나라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대 단위 영토의 국가들이 사막과 황무지와 동토로 사람이 살기도 힘들고 농사짓기도 어려운 곳이 있다면, 브라질은 동서남북 어디서든 농사도, 사람도 살기 좋은 천혜의 환경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몇 년 전 북부 지역에서 유전마저 발견됨으로 인해 이제 명실상부한 산유국으로, 농 · 임산물 수출국으로, 버스와 헬리콥터 생산국으로 선진 브라질로 가는 발판을 차곡차곡 다지고 있다.

12월 14일 화요일 저녁 8시, 실비오마테스의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인근 마을 빠요샤(Palhoc'a)에서 이 지역 신문 "Jornal Palavra Palhocense' 와의 인터뷰가 행해졌다. 에스페란티스토 세르기오 셀(Sergio Sell)이 주도로 에스페란토 아카데미(Esperanto de Academio) 창립식을 갖는 그 자리에 로자의 양반춤과 민요 공연이 함께 펼쳐져 가득 모인 많은 사람들의 카메라 세례와 열띤 호응 속에 기자와의 대담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이틀 후에는 산타 카타리나주 최대의 신문 'DIARIO CATARINENSE'와의 인터뷰가 장장 1시간 동안 해변을 등에 진 아름다운 카페 미소에서 펼쳐졌다. 사진기자의 강력한 요구로 저녁에는 로자의 공연복 차림 사진 촬영이 이어졌다. 세계 여행의 목적과 브라질에서의 느낀 점, 그리고 에스페란토에 대한 궁금증 등 계속되는 질문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받아 넘기는 우리는 이미 50대 부부라는 말에 두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근무 중에도 짬만 나면 우리를 차에 태우고 사방팔방 모두 구경시켜주는 실비오마테스는 크리스마스 송년 모임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하자고 권유한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선 그 모임 장소가 대단하다. 개인의 집이라기보다는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갤러리 하나를 옮겨온 듯한, 화장실마저도 잘 꾸며 놓은 거실 수준만한 멋들어진 집에서 그 이름도 흥미진진한 서양식 파뤼(Party)를 한다.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하며, 어깨가 드러난 우아한 복식들, 12cm킬힐에 찬란한 금장식은 기본, 너나없이 곱게 차려 입은 화려한 복장 사이로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를 신고 등장한 배! 째라 부부의 형상이 가관이다. 의사, 변호사, 교수, 사업가 등 브라질 상류층의 파티문화를 경험하는 색다른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실비오마테스도 데바도 번쩍이는 실크 의상 차려 입고, 1층 홀에서는 매혹적인 포도주와 친절한 서비스맨이 제공하는 갖가지 와인 향기 가득하고, 교실만한 주방에선 산해진미가 만들어지고, 바다 빛 풀장이 출렁이는 곳에서는 카라와 애연가들이 모여 시거를 즐긴다. 성탄을 축하하는 시낭송이 끝나고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로자의 양반춤과 새타령, 아리랑 공연이 펼쳐졌다. 한국 전통 예술이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한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는 이들의 칭찬에 로자도 실비오마테스도 입이 귀에 걸린다. 피부과 의사인 마비아는 로자 손을 꼬옥 잡고 다니면서 우리의 여행이야기와 나의 피부 관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51세라는 로자의 나이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비법이 무엇이냐는 말에 자외선 차단과 쑥뜸이라고 영어로 어렵게 설명 해주었다. 실은 화장발~ 조명발인데^^ 12월 18일 토요일, 어제는 브라질 상류층의 일면을 보았다면 오늘과 내일은 브라질 농촌의 서민들 생활을 즐겨 보자며 실비오마테스와 함께 향한 곳은 그의 아내 데바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Petrolandia(페트롤란디아) 라는 시골이다.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 동쪽으로 180km 떨어진 이곳은 예전에 석유가 발견되어 노다지 땅으로 불렸지만 매장량이 너무 적고 질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더 이상 시추 작업이 이루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유전이 발견되었던 곳이라 하여 페트롤란디아라고 불린다. 큰딸과 사위, 두 한국인이 온다고 아담한 농촌 주택 마루 가득 크리스마스 트리와 네온사인이 덩실덩실 걸려있다. 생전 처음 본다는 한국인 얼굴 만지작거려도 보시고... 웃음이 떠나지를 않는 두 노부부의 행복한 미소와 함께 동네 방네 소문이 벌써 쫘악~ 우리 부부 보겠다고 어린이 3-4명도 수줍게 등장하고 무더운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환영식에 우리도 싱글벙글.^*^ 데바 조카 와그네르는 자신과 누나, 여자 친구 이름까지 한글로 써 달라 요청하고, 난생 처음 보는 글자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요리조리 돌려도 보고, 비틀비틀 따라 써 보기도 하고... 하늘에는 휘영청 큰 반달이 뜨고, 시골집 마당 탁자에는 시원한 맥주와 치즈가 분위기를 돋구며 로자의 노래를 재촉한다. ‘사랑가’로 우선 내가 먼저 부르고 이어 데바 친정아버지 안토니오가 답가를 하신다. 주거니 받거니 술도 익고, 소리도 무르익고 이웃집 강아지 블레카도 곤히 꿀잠에 빠지고, 맥주도 바닥을 드러낼 때쯤, 이미 시계는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삼바 장단만큼이나 리드미컬한 데바 친정아버지의 코고는 소리와 사위 실비오마테스의 숨 꼴깍 넘어 갈 듯한 코골이, 거기다가 카라의 반 박자 먹고 들어가는 드르렁 소리에 선잠을 잔 로자의 볼멘 항변에도 껄껄 웃어주시는 데바 부모님의 따뜻한 포옹을 뒤로 하고 1박 2일이 짧지만 구수한 브라질 농촌 체험은 이렇게 끝났다. 매일 매일 호랑이 녀석 장가라도 가는지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는 햇빛 쨍쨍거리다가도 거의 하루 한번은 비가 손님처럼 후딱 왔다간다.
이곳의 짙푸른 신록이 달리 생겨난 것이 아니다.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 앉아 있으면 얼음도 아이스크림도 반갑지 않다.

거리마다 자동차가 줄을 잇고, 백화점, 상가에도 인파로 들썩이고 세계 경제 한파에 지구촌 곳곳이 덜덜 떨었는데도 브라질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푸진 인심과 웃음을 우리 부부에게 한껏 베풀어 준 실비오마테스에게 깊은 감사의 포옹을 끝으로 그의 사업도 덩달아 번창하길 기원하는 바람을 안고 배! 째라 부부 행복한 발길을 꾸리찌바로 돌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