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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네번째 마당- 스페인, 돈베니또, 메리다 편
여행 | 2010/12/22 22:33

서른네번째 마당- 정열의 나라 스페인

(돈베니또, 메리다 편 10/27-11/4)


아직도 인정이 살아있는 스페인의 작은 도시 돈 베니또(Don Benito)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여기 저기 다 들리고, 세워 달라는 대로 다 정차해주고,
너무 후한 인심에 처음 방문하는 배! 째라 부부

도대체 언제 하차하는 것인지 통 가늠을 못하겠다.

세비야에서 3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는 돈 베니또를 4시간이

더 걸렸으니, 들판 가득 싯누렇게 익어가는

올리브도 잘 보이지 않고

캄캄한 어둠만이 우리네 시골 들판과 꼭 닮았다.

건조한 땅 스페인의 농토에서도 씩씩하게 잘 자라는 포도와

올리브나무들이 광야를 가득 채우고, 각 지방 정부마다

산불 우려로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해충박멸을 위한 들불 연기는

여기저기서 뽀얗게 피어오른다.

지난 8월 루마니아에서 만난 SAT멤버인 카니(Kani)의 제안으로

스페인의 마지막 행선지로 돈 베니또를 정했다.

이어지는 여행 재충전을 위해 푹 쉬다 가라고

자신의 마을 방문을 적극 추천하였다.

여행 7개월째 고단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스페인 이후의

여행 일정을 위해 무엇보다도, 내 집처럼 맘도 몸도 편히

늘어지게 있어도 될 그런 집이 필요했다.

이제껏 우리를 환대해준 모든 분들이 내 집처럼

아무 조건 없이 열쇠를 건네주어서 편히 잘 쉬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여행 7개월 되면서 틈만 나면 하품과

짬난 나면 졸음으로 피로한 상태가 나타난다.

덩치 만큼이나 통큰 인심 카니는 자신의 집 2층을 통째로

우리에게 내주며, 오늘부터 2층은 배! 째라 부부 아파트란다.^^

맘껏 늦잠자고, 배고프면 1층으로 내려와서

음식 챙겨 먹고, 가끔 심심하면

현직 중고등 동료 교사 초보 에스페란티스토 3명을

만나게 해주기로 계획도 했단다.

건축 교사인 에스테반, 생물교사인 페드로,

경제 교사인 요하니노 등

생기발랄, 웃음이 푸진 삼총사 선생님들은

머나먼 곳에서 온 손님 맞이를 위해 기꺼이

푼수 놀이도 마다 않고

온 몸을 다 바쳐 기쁨조가 되어 준다.

카니의 학교(I.E.S. Cuatro Ca )에서 펼쳐진 로자의 양반춤

공연에 신축 체육관 건물 내에 들어오지 못한 학생들은

유리창 밖에서 관람하고, 우리의 중고등학생에 해당하는

이 아이들이 도저히 중고등학생 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짙은 마스카라에 아이라인, 피어싱과 문신은 가벼운 악세사리,

가슴골이 깊이 파진 복장은 물론이요,

누가 선생이고 학생인지, 좀체 구분이 안갈 정도로

너무도 성숙하고 화려한 화장으로 소년 소녀다운

싱그러움은 온데 간데 없다.

그 와중에도 로자의 양반춤 공연 후 쏟아진

영특해 보이는 남학생의 날선 질문,

'한국인들은 북한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냐고?'

순간 당황...그러나 침착하게,

우리 민족은 하나의 언어를 쓰는 한국인이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통일 되는

그날을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다고 응답했다.


엑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지역에 속하는 돈베니또와

로마시대 유적이 남아있는 메리다(Merida)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관광명소로 멋진 곳이다.

고대 로마시대 물을 관리하고 농사용 용수를 공급했던

기적이라 불리는 '미라클'과 달의 여신 다이아나 신전도,

멕시코를 정복한 헤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의

의기양양 동상도 볼만 한 구경거리이다.

11월 1일은 크리스트 순교 성인의 날이라 하여 모두가

편안한 휴일을 즐긴다. 성인의 뼈라고 불리는

달착지근한 하얀 롤 말이 간식을 먹으며

설탕같은 달디 단 휴식을 취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있는데 갑자기

저녁 식사 후부터 카라가 가슴이 답답하다며 호소한다.

웬만해선 아프다고 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의 표정으로 보아선 보통 심각한 정도가 아니다.

어제 저녁 CNT노조 100주년 기념행사장 카페 공기가 나빠서

목도 코도 답답한 것이라 여겼는데 밤새 숨도 못 쉬고

끙끙 앓으며 한 숨도 잠들지 못한다.

이제야 말로 20여년 넘게 피워 온 담배 후유증이

그를 덮친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 짓고

앞으로 여행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밤새

걱정도 팔자인 로자가 고민한다.

여기서 여행을 멈추고 한국으로 돌아가

병원 가서 진단을 받아보자는 로자의 건의도

듣지 못할 정도로 카라는 가슴의 통증으로 힘들어 하고

오만가지 걱정과 망상에 로자도 괴롭기는 마찬가지.



여행 중에 만난 어느 부부의 생과부 될 뻔 한 이야기 하나,

남편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기차가 잠시 멈춘 사이 발견하고는

후딱 사서 얼른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사라졌다.

남편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기차는 야속하게 발차하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새내기 남편은 안보이고...

눈물 콧물 뒤범벅에...눈에 뵈는 것 없이 외쳐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외침 뿐...

앞에 앉은 외국인, 한마디 거든다.

아무래도 당신 남편이 기차를 놓친 것 같다고 염장 지르고...

엉엉 울고 불고 죽자 사자 널브러져 있는데,

철딱서니 없는 남편은 근 1시간 만에

과자가 담긴 비닐봉지 손가락에 걸고

뱅글뱅글 돌리며 희희낙락 돌아오고...

이야기 인즉, 열차 마지막 칸 겨우 잡아타고

우리 기차 칸으로 오는 도중, 호기심 많은 인도인들의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응답하고 오느라, 아내가 기다리는 줄도

잊은 채, 그들과 손짓 발짓 대화 하느라, 늦었다네..

다행히 생과부 면해서 고맙지만

저 인간 믿고 한 평생 살아 갈 생각하니 까마득해서

여기서 결혼 생활 끝내고 싶었다고 한다.

또 다른 부부 철부지 남편, 여기가 객지란 사실도 잊은 채

저녁 랩 공연 보고 오겠다고 집 떠나가고 밤새 돌아올 줄 모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새 색시 울다 지쳐

여기저기 인터넷 뉴스 뒤져 보고, 간밤에 혹시 동양인 사고로

비명횡사나 한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 하고,

전화 한 통화도 없는 남편이 사고로 무슨 일이 당한 게

분명하다 생각하며 울며 지샌 그 시간에

수천 개의 영상들이 떠오른다.

여자 잘못 만나 요절했다는 비난에...

팔자 드센 년이 남편 잡아먹었다는 욕설에...

시신은 어찌 수습해야 하는지...

단 몇 시간 만에 비련의 드라마 한 편이 완성되었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 다음날 무사히 돌아와 하는 말

공연이 어제 저녁 7시인 줄 알았는데

밤 12시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다.

차가 없어서 집에 못 가는 게 뻔하니깐,

택시비도 아낄 겸, 첫차 타고 왔다네,

이런 절약정신이 기특하지 않냐고...

방귀 뀐 놈이 성을 더 내듯이 되려 노발 대발...



암튼 이 세상 철부지 남편들 땜에 오늘도 속 썩는

아내들이여.. 더 이상 속 끓이지 말고 대범하게

인명은 제천이라 여기며 맘 편히 살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절대 대범하지 못한 로자의

근심 걱정은 카라의 담배 연기 만큼이나 무성해진다.

병원도 갈 수 없어 그냥 쑥뜸의 효력에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카라의 등짝 폐유와 고황의 자리를

뜸 뜨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다음날 무사히 일어난 카라는 로자의

질긴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속는 셈치고 폐유, 고황자리

3천 번 쑥뜸을 약속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롭게

담배 피는 것에 강력히 제재를 가하겠다는 조건과 함께.

이렇게 짧고 오싹한 사건은 쑥뜸으로 기운차게 마무리되고

오늘도 로자의 관대한 허가 속에 카라의 담배 불은

솔솔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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