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번째 마당-정열의 나라 스페인 (레알, 알마구로, 코르도바, 세비아 편 10/23-10/27)
10월 23일 토요일 오후 1시 마드리드 에스페란토연합회 강의실에서 로자의 양반춤과 민요 공연을 서둘러 마치고 마드리드와 급히 이별을 고했다. 하루 2회 공연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쌩쌩 날리는 신바람과 함께 배! 째라 부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신난다. 스페인 에스페란토 연합회 회장인 페드로가 귀한 한국의 전통예술을 볼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며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레알(Ciudad Real)에서 열리는 CNT(스페인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행사에 배! 째라 부부 초대를 건의하였다.

카라의 공정무역과 에스페란토 평화 활동, 로자의 한국의 전통예술 발표시간이 함께 마련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만에 도착한 레알에서는 젊고 발랄한 CNT노조원들과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열렬한 포옹과 키스로 우리를 반겨준다.

어느 누구 생전 본 적도 없는 이들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와자지끈 허리가 두 동강이 나도록 안아준다.^^ 깔끔하게 단장된 CNT사무실에서 카라의 발표와 로자의 공연이 펼쳐진다. 열렬한 박수갈채와 카메라 세례 속에 푸진 인심 가득한 음식과 포도주로 피로를 씻어내며 화기애애 만남의 기쁨을 즐긴다. CNT는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노동조합으로서 프랑코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결사 조직된 조합이다.

1994년 미국 시애틀에서 전 세계 아나키스트 3,000여명이 모여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테러리스트라는 오명과 실천하는 활동가란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나키스트들은 오늘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강령을 가슴에 품고 세계 각지에서 투쟁을 벌인다. 좁디 좁은 골목과 하얀색의 페인트 칠, 시원한 돌 기운을 받아 건축한 주택들이 즐비한 레알의 이웃 지역 알마구로(Almagro)는 매년 6-7월 중 12일 동안 국제연극제가 열리는 곳이다. 한 여름 40도까지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를 막아내고 시에스타라는 한 낮의 달콤한 휴식도 탄생한 스페인의 곳곳은 그야말로 거대한 광장과 뒤늦은 식사, 포도주 세례, 왁자지껄 정열적인 사람들의 흥취로 밤새 거리를 달군다. 
알마구로의 대 광장(Plaza Major)은 여느 지방과는 달리 초록의 창살과 풍만한 허리 곡선같은 기둥들로 마치 잘 정돈 된 전원 공동 주택 같다. 신록 빛깔의 시원한 느낌이 한 낮의 더위 마저도 상큼하게 이겨낼 것 같다. 싱싱함이 묻어나는 에스페란티스토 라울(Raul)의 배려로 포근한 잠자리와 알싸한 음식이 더욱 군침을 돌게 하고 총각이면서도 깔끔하게 방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그의 집에서 맞는 하루는 황홀한 숙면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커피숍에서 선혈이 낭자한 초현실적인 그림들과 어울려 우리 좌석 옆의 아리따운 두 낭자의 사랑 놀이는 여성동성애를 처음 접하는 로자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로자의 놀란 두 눈을 의식한 듯 라울이 한마디 거든다. 동성애자들의 표현의 자유는 스페인 어디에서나 누릴 수 있는 인권이라며 당황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도무지 그냥 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로자의 어색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두 여자의 진한 애정 표현만이 식은 찻잔을 달군다. 진한 애정 표현과 성의 개방화도 라울의 할머니 시대에는 전혀 허용하기 어려운 과제였단다. 그 시대에는 담배 피는 것은 물론이요, 헤픈 웃음 마저도 통제 받고 순결치 못한 여자로 낙인찍히는 시대였다고 한다. 거리 곳곳 마다 화끈한 애정 영화 찍는 사람들의 행위가 자유로운것이 스페인 역사상 약 100여년 내외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덧붙인다. 
집집마다 아름다운 정원과 벽 장식으로 유명한
코르도바(Cordoba)를 친절한 총각 라울이 데려다 주는 바람에 룰루 랄라 정말 편하게 왔다. 중세 시대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라울의 말이 한치의 틀림도 없다. 얼마나 아기자기하게 마당을 장식했는지 작렬하는 태양을 피하고자 잠시 한숨 돌려 이집 저집 구경하고 있노라면 남의 집일 망정 냉큼 들어가 꽃들과 입맞춤하며 사랑노래 부르고 싶을 만큼 발길을 옮기기가 싫다.

앙증맞게, 우아하게, 때론 독야청청하게, 알록달록 동글동글 도자기 접시 벽 장식물과 어우러져 세련미를 더해준다. 이슬람의 영향으로 생겨났다는 타일 모자이크 벽 장식물들은 좁디 좁은 골목의 답답함을 일거에 날려 버리는 촌철살인 같은 악세사리이다. 웃음도 주고, 즐거움도 주는... 코르도마 골목마다 극성스런 경찰의 호위는 한편으로는 여행객들을 안심하게 해주지만 뚱뚱한 몸매에 자전거로 엉금거리는 경찰 아저씨들이 날고 뛰는 잽싼 새치기들을 당할 재간이나 있을지 심히 걱정된다. 40유로 이하의 절도 강도 사건은 하룻밤 유치장에서 간단하게 때우는 걸로 그 죄과를 해결한다니 참으로 거시기 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다.
마치 보물 찾기라도 하듯 골목 구석마다 숨겨져 있는 중세의 볼거리를 찾아내는 숨박꼭질은 코르도바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손님을 환대하는 소나무(迎客松) 뷔페 식당에서 먹은 중국인 주방장이 만든 스시는 이제 스페인 전역 곳곳에서 맛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고, 오늘도 중국인들이 일본 음식 스시와 사시미를 팔면서 스페인 곳곳을 잠식하고 있다.

코르도바에서 2시간도 안 걸려 도착한 세비야(Sevilla)는 플라멩고(Flamenco)의 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대표적인 곳 세비야는 대성당(Catedral)과 이슬람풍의 정원이 아름다운 성 알카사르(Alcazar)가 인상적인 곳이다. 무엇보다도 무료로 플라멩고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면 바로 코앞에 두고도 찾지 못할 그런 곳이다. 세비야 안내 지도 52번(Calle Levies)에 위치한
카르보네리아(Carboneria)가 바로 그곳이다. 운 좋게도 이 지역 에스페란티스토 안토니오의 안내로 관람하게 된 플라멩고는 한과 흥이 적절히 조화로운 그야말로 스페인판 살풀이라고 해야 할까... 살찐 카르멘의 후예가 보무도 당당히 발을 구르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춤을 추는데 잠시 뚱보 댄서의 등장에 실망했던 로자의 마음을 단 몇 분 만에 빼앗아 간다. 무엇이 그리도 그토록 애절한지 한 맺힌 사연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젊고 샤프한 남자 가수의 애닲은 노래소리와 기타소리는 100여명의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는다.
건축가인 안토니오마저 배우고 익혔다는 플라멩고는 이 지방 사람들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세계에 내 놓은 자랑스런 상품이자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고물가의 나라 스페인에서 싸고 안락한 호스탈(Hostal) The Living roof의 낮은 투숙 가격에 잠시 감격했었다. 감격도 잠시, 저렴함이란 수상함 속에 작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하룻밤 두 사람이 26유로이지만 담요, 수건, 컴퓨터 이용료 등 야금 야금 돈 빼먹는 수법이 너무 자연스럽다. 다행히 아침은 공짜라고 하니 악착같이 먹여야겠다.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카니(SAT 멤버)의 집에서 푹 쉴 날 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스페인의 마지막 행선지 돈베니또(Don Benito)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