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두 번째 마당-정열의 나라 스페인 갈라파가르, 엘에스코리알, 아빌라편 10/21-10/23)
우리나라 남산에서 돌멩이를 던지면 김, 이, 박씨가 맞는다면 스페인에서는 마누엘, 조안, 페드로가 맞는다고 한다. 4명의 에스페란티스토가 우리 부부 마중을 나왔다. 그 중 세 명이 마누엘이란다. 마누엘1, 2, 3으로 불러도 쉽게 구분이 안가서 그냥 얼렁뚱땅 넘어간다.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30km 떨어진 갈라파가르(Galapagar)에 살고 있는 마누엘이 페드로 집에서 나오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한다. 심리학교수인 마누엘은 동글동글한 인상과 천진한 웃음으로 사람 좋은 모습을 간직한 에스페란티스토이다. 오늘부터 안락하고 포근한 잠자리에서 숙면을 취할 것 같아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마드리드 페드로 집에서 8명이 복작거리면서, 우리 부부는 응접실 쇼파와 침낭을 벗 삼아 자느라 5박 6일 동안 등과 허리가 좀 고생했었다. 명색이 교수님댁인데...얼마나 좋을까... Moncloa역에서 버스로 30분 만에 도착한 마누엘의 아파트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오솔길이 산뜻한 곳이었다. 겉에서 보기만 해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곳 같아서 신난다. 화려한 아파트 입구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마누엘의 집은 5층이지만 3층에서 내려야 한 대요, 고장이 나서 꼭대기 층에 있는 그의 집까지는 못 간대요. 어째...예감이 영~ 심상치가 않다... 낑낑 배낭 메고 도착한 마누엘의 집은 상상 이상으로 소박하고 좁았다. 아내와 둘 만이 살기 때문에 큰 방도, 주방도, 널따란 거실도 전혀 필요 없다고 한다. 침실도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옥탑아래 오직 한 개 뿐. 에잉~ 그럼, 우린 어디서 자요? 거실 쇼파와 바닥에 침낭 깔고 자면 되죠... 걱정도 팔자라는 듯, 명랑 발랄하게 대답해 주는 마누엘의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아니, 교수님댁이 왜 이리 좁고, 초라해... 하기야 이십 여 년은 메고 다녔다는 손때가 묵은 가방을 보고 짐작 했어야 했다. 교수님이란 분이 생전 처음 보는 우리 부부 마중 나오느라 긴긴 시간 역전에서 발 동동 기다려주고, 페드로네 집 까지, 야밤에 전철로, 도보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이미 권위의식과 체통(?) 같은 것은 스페인의 박물관에나 쳐 박혀 있는 구시대의 산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목에 기브스 하고 댕기는 하잘난 교수님들이 흔해서인지, 마누엘의 사고방식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온다. 
마누엘과 그의 아내 코랄이 추천하는 갈라파가르에서 멀지 않은 고장 엘에스코리알(El Escorial)을 다녀왔다. 마치 스페인판 자금성을 보듯, 사각이 반듯하고 널따란 성에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없다. 왕궁(SAN LORENZO D EL ESCORIAL) 옆으로 조성된 키 작은 정원수들과 연못이 없었다면 오직 돌멩이들만 허용되는 나라에 온 것 같다. 권력다툼으로 자객들이 침입과 살해위협에 숨을 수 있는 곳을 전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갖가지 돌을 사람의 손으로 기기묘묘 아름답게 장식하고, 표현했던 다른 지역 왕궁과 교회에 비하면 거의 사각형의 돌과 건물만이 장대하게 남아 있다. 돌 바닥을 운동장 삼아 뛰어 노는 아이들이 없었다면 삭막한 돌 기운으로 맥 빠질 뻔한 곳이었다. 
실망감을 안고 서둘러 이웃 고장 아빌라(Avila)로 향했다. 세계 여행 고수들이 하는 말 '큰 기대는 큰 실망과 동기동창'이란 금언을 품고 아빌라에 도착했다. 기대이상으로 멋진 성벽이 빙 둘러쳐져 있는 이곳은 여기저기 소문 듣고 찾아 온 관광객들이 곳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소 정원 10명을 채우지 못해 꼬마 열차를 타고 성벽 전체를 유람하는 기회는 놓쳤지만 걸어서 1시간이면 성곽을 타고 전체를 볼 수 있는 이곳은 기대이상의 경관을 보여주었다.

푸르른 초록이 숨 쉬는 신선한 곳은 아니었지만 아빌라는 부드러운 성곽과 조화롭게 조성된 도로가 신비한 석양과 어울려 신비한 광채를 내 뿜으며 스페인의 새로운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