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한 번째 마당- 정열의 나라 스페인 (마드리드, 톨레도, 살라망카편, 10/15-10/21)
18세기 브루봉 왕조의 전성기를 누렸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Madrid)는 전 세계 소매치기들이 로마에서의 혹독한 검문 때문에 이곳으로 이주 해 왔다는 정보로 거리 곳곳 마다 형광색 복장을 차려입은 경찰들로 인해 매우 안심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기, 강도, 퍽 치기 등 흉악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로마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대대적인 불심검문이 유색인종에게 가해지고 있다는 흉흉한 낭설도 덩달아 떠돈다. 한 여름의 휴가 성수기를 피해 도착했는데도 거리마다 넘쳐나는 관광객들의 행렬은 로마를 능가하는 것 같다. 조상 잘 만나서 관광 사업으로 떼돈 벌고 있음을 부러워해야 할지, 호전적인 선조들을 안 만난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스페인 방방곡곡 마다 광장 이름 앞에 거대한(Major)이란 형용사를 부치는 걸로 보아서 제국의 흥망성쇄가 모두 이 광장과 함께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Plaza de Major, Plaza Sanchez 등
황제 필리페 3세는 17세기 초(1616-1619)에 거대 광장(Plaza Major) 건축을 명령하였으나 불행히도 완공을 못 보고 만다. 다만 광장 한 가운데 동상이 되어 오늘도 용맹한 모습 구기지 않고 체통을 지키며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광장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이... 
웅장한 식물원이 실내에 자리 한 아토차(Atocha)역에서 가까운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Museo Nat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에서
피카소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렌다.
‘게르니카(Guernica)'란 명작을 보기위해 몰려 든
세계 각 국의 관광객들이 이 그림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독재자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 기간(1936-1939) 동안 자신을 반대해 온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역의 주민들 70%를 무차별하게 보복 살해한다. 이 극악무도한 사실을 그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피카소가 그 소식을 듣고 제작한 작품이 바로 게르니카이다. 피카소의 육신은 가고 없지만 그의 예술 정신은 찬연하게 살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없는 메시지를 전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 의 상상 이상의 그림들과
피카소의 또 다른 작품 ‘프랑코의 꿈과 거짓말(The Dreams and Lies of Franco) 등이 소장되어 있는 이 박물관은 무료 공연이 상시 펼쳐지는 바로 옆의 산체스 광장과 함께 둘러보면 더욱 근사하다. 눈과 귀와 가슴을 열고 잠시 마드리드의 안팎에서 행해지는 예술의 향기에 젖어 본다면 스페인이 왜 정열의 나라로 불리는지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남녀노소 관객들이 기립하여 보내주는 화끈한 박수와 환호성이 그야말로 산삼 보약 같은 기운을 예술가들에게 전해 주기 때문이다.

여행 7개월 째 약 15개국을 방문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곳에 사는 에스페란티스토 페드로(Pedro)와 그의 아내 미르얌(Mirjam)은 죽어도 못 잊을 사람들이다. 사랑의 실천을 눈 하나 꿈쩍 않고 행하는 멋쟁이 젊은 부부를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우리 여행이 가져다 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 생각한다. 거창한 구호도 생색내기도 없는 이 부부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여행 기간 내내 건조해진 배! 째라 부부의 가슴을 적신다. 그루지아 난민 이아와 그의 어린 아들을 극적으로 구출, 자기 집 까지 데려오고, 지금껏 7개월 동안 방 하나를 제공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모자를 꼬옥 꼭 지켜주고 있었다. ‘산 사람은 어찌되었든 간에 살아야 한다면서...’ 기찻길, 버스길을 이용하여 숨죽이며 돌고 돌아 폴란드에서부터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마치 영화 줄거리를 들려주듯 담담하게 얘기하는 페드로와 그 옆에서 어린 딸 플로라를 안고 젖을 먹이는 독일 출신의 아내 미르얌의 행동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인간애의 구현이며 승리였다. 오는 12월이 되면 스페인 정부가 불법체류자들을 양성화 시키는 특별 법령이 내릴 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서... 에스페란토 정신이 위대한 것인지... 이 두 사람이 대단한 것인지... 그저 말문이 막히면서 콧등이 시큰거려온다. 나체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페드로를 대면하기 전에는 황당무계한 돈키호테의 후손을 만나는 것이나 아닌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왜 저 사람 둘은 옷을 벗지 않느냐’는 전처소생의 딸 야스나의 항변이 더욱 배! 째라 부부의 등골을 서늘케 한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섹스 심볼도 달라졌다는 페드로의 설명이 재미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조그마한 발이 성적 상징이었다면, 일본은 하얗게 빛나는 목의 뒷부분, 아랍은 어느 정도 천으로 가려 진 얼굴 등... 남녀 성기가 섹스 심볼로 한 몫 하게 되는 것은 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반어법적인 상품으로서, 모순적인 역할을 극대화하기 시작하면서라고 설명한다. 수줍어 감추어야 하는 그 무엇으로 포장됨으로써 돈으로, 상품으로 주고 받는 추악한 거래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대 자연 속에서 암수의 성기를 가리고 사는 동물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며...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자연스럽게 사는 길은 더우면 벗고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되기 때문에 나체주의가 가십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한다. 페드로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쉽게 찬성도 못 하겠다. 괜히 맞장구 쳤다가 우리 함께 같이 자연스럽게 벗고 지내자 할까봐.^^ 황소가 상징이었던 옛 톨레도(Toledo) 왕조로 가는 기차 요금이 왕복 일 때는 각각 1유로씩 할인 혜택을 준다. 두 사람이 원래는 40유로를 지불해야 하는데 36유로로 기분 좋게 깎아준다. 채 한 숨 졸기도 전 아토차역에서 30분 만에 도착한 톨레도는 성벽 밑으로 강이 빙 둘러 흐르고 절벽 같은 돌산 위에 작은 성이 우뚝 서 있다. 빽빽하게 모여 있는 민가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삼림이 물도 부족하고 농토도 매우 척박한 곳임을 알게 한다. 거대함 하고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톨레도는 명성과 달리 그림이 잘 나오는 명소는 아닌 것 같다. 투어버스를 이용해야 만이 쉽게 이곳을 돌아볼 수 있어서 모두 다 탔지만 실망의 빛 들이 역력하다. 투어버스의 오른쪽 편에 앉아야 그나마 마을도, 강도 성벽도 차근차근 볼 수 있다. 
넘치도록 근사한 지역들을 많이 구경해서인지 이곳 톨레도의 고성하나로는, 눈이 이미 높을 대로 높아진 배! 째라 부부를 만족시켜 주지를 못한다. 에이~괜히 비싼 돈 들이면서 왔나봐...(투덜투덜)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고 와서 보면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소문난 잔치 집 먹을 것 없다고 풍문에 비해 그리 멋들어진 곳은 아니어서 실망을 안고 돌아간다. 정복국가의 후손답게 가게 곳곳 마다 진열되어 있는 칼과 갑옷 등이 황소, 타일 모자이크 장식 등과 어우러져 바삐 되돌아 가려하는 우리 발길을 유혹한다. 
호주의 최남단 타즈매니아주 호바트에서 만난 살라망카란 이름을 스페인에서도 들을 수 있다니 재미있다. 호주 살라망카는 매주 토요일 노상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지는 재래시장이 열리는 곳이다.
반면 스페인 살라망카(Salamanca)는 세계 각지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위해 온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모이는 대학촌이다. 일반적인 관광지가 중장년과 노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곳이라면 이곳 살라망카는 손에, 등에 책과 함께 걸음을 재촉하는 젊은 대학생들로 골목마다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희고 검고 노란 청춘들이 내일을 위해 땀 흘려 공부하는 이곳은 대학 건물 자체도 걸작품이다. 
폰티피씨아 대학(Universidad Pontificia)도, 파리의 노틀담 성당 비슷하게 생긴 NUEVA성당도, 바실리카 양식의 살라망카 성당, (Puerta de La Catedral de Salamanca), 산마르틴 교회 (Iglesia de San Martin)도 모두가 예술의 향기를 듬뿍 머금은 모습에서 석조예술 섬세함의 극치를 보게 된다. 
신성한 교회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던 시절에나 가능했을 교회 성당 건물의 거대화는 신의 권위와 영험함을 그림으로, 조각품으로 성스럽게 표현하고, 웅장함으로 그 제도 권력을 형상화 내지는 우상화 시켜왔다. 자신도 살라망카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학습했다는 미르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다녀 온 살라망카는 안 보고 왔으면 천번 만번 후회했을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었다. 한 겨울의 혹독한 추위 말고는 버릴 것 하나 없는 이곳은 미르암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스페인의 도시 중 하나이다. 눈만 뜨면 ‘마미(엄마)’만 찾는 찡찡이 플로라와 한번 맞 짱 떴다 하면 사정없이 달려드는 쨍쨍이 야스나와 눈치 코치 없이 얹혀 있게 된 우리 부부, 그루지아에서 온 모자, 페드로, 미르암 등 8명이 복잡거리며 매일매일 소란스런 하루를 맞이한다. 이런 혼잡이 민망했던지 페드로가 건네주는 박물관 티켓을 들고 우리가 향한 곳은 마드리드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프라도(Museo Nacional Del PRADO)이다. 스무 명의 자식을 두고도 끊이지 않는 성 추문으로 얼룩졌던 희대의 난봉꾼 화가 고야(1746-1828) 동상이 정원 한 가운데 서 있는 프라도 박물관에는 때마침 ‘르느와르 특별전’이 열려서 관람객들 줄이 꼬리를 물고 길게 길게 늘어져 있다. ‘명상록’으로 우리의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철학자이며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맹인 시인 호머, 사자 머리 가죽을 발로 뭉개며 늠름하게 서 있는 헤라클레스, 생각 보다는 숏 다리인 안토니오 시저 등 로마 시대 최고 스타군단들이 가슴을 쩍 벌리고 서 있다. 재미있게도 이 시대 모든 남성들의 우상이며 여성들의 로망, 당대 최고 완소남인 이 영웅들의 남근이 겨우 모양만 유지한 채 한결같이 쪼개져 대롱대롱 간신히 매달려 있다. 우리의 옛 풍속 중 아들을 낳기 위한 각고의 노력 가운데 하나로, 남성 성기 모양의 돌을 갈아서 먹었던 그 이야기가 연상된다. 아들 생산이 필수덕목이었던 시대에 잘난 아들 하나 낳아야 안방마님으로 호령도하고, 대를 잇게 한 공로도 인정 받는다. 일꾼을, 병정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죄는 칠거지악의 하나로 혹독하게 다스렸던 우리의 풍습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면 너무 오지랖이 넓은 상상력인가^^ 12마리 사자 중 현재 4 마리만 남아 떠받치고 있는 필립 2세의 Table Top( Matteo Bonuccelli, 1651)에서 가우디 문양 재창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었던 것도 발의 피로를 잊게 한 박물관 순례의 즐거움이었다.

마드리드 시내 한 가운데 낭만적인 호수와
파르테논 신전 기둥을 모셔온 듯한 알폰소 7세의 별장(Parque de El Retiro), 브르봉 왕조의 유산이며 우체국으로 변신한 Puerta del Sol Royal Post Office, 에스파냐 은행 등 거리 곳곳에 볼거리, 감동거리가 넘쳐나는 마드리드는 거대한 땅 덩어리 스페인의 중심지로서, 유럽문화를 선도하는 수도(1992 지정)로서, 풍성한 유물 유적이 발길 닿는데 마다 보존되어 있는, 질시와 부러움으로 숨이 막히는 곳이었다. |